# 조명 연합군의 왜군 공략
1598년 8월에 명나라 형개가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를 사로군(四路軍)으로 편성하여 울산·사천·순천 등의 왜군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군(울산)은 명나라 마귀, 조선 김응서와 선거이, 전라도의 서로군(순천)에는 명나라 유정, 조선 권율,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군(사천)에는 명나라 동일원, 조선 정기룡이었다. 바다의 수로군(水路軍)은 명나라 진린과 조선 이순신이었다.
조선은 각 도의 병사와 수사도 사로군(四路軍)에 소속시켰다.
충청ㆍ전라는 서로에, 경기ㆍ황해ㆍ경상우도는 중로에, 평안ㆍ강원ㆍ경상좌도는 동로에 속하게 하고, 호서ㆍ호남의 수군은 수로(水路)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11만 3천명(명군 9만 2천 명, 조선군 2만 1천명)으로, 동로군(東路軍)는 29,514명(명군 2만 4천 명, 조선군 5천 5백 14명)이고, 중로(中路)군은 2만 9015명(명군 2만 6800여 명, 조선군 2,215명), 서로(西路)군은 2만 7828명(명군 2만 1900명, 조선군 5,928명), 수로(水路)군은 2만 6728명(명군 19,400여 명, 조선군 7,328명)으로 모두 합하면 113,085명(명군 9만 2100명, 조선군 2만 985명)이었다. (선조실록 1598년 10월 12일 7번째 기사)
그런데 조명연합군이 남하할 시점에 일본에서 큰 변고가 있었다.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교토 후시미 성에서 사망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
나니와(옛 오사카의 지명)의 영화는
꿈에 또 꿈인 것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대로에게 5살 난 아들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죽거든 지체없이 조선에서 철병하라.”고 유언했다.
히데요시 사망을 계기로 5대로는 조선에 있는 왜군 철수에 착수하였다.
10월 1일에 일본 특사가 부산으로 건너왔다. 일본 특사는 가토, 고니시,․ 시마즈 등을 만나 철군을 지시했고, 일반 사병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그런데 조명연합군에게도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이 알려졌다.
# 조명연합군, 사천과 울산 전투에서 패배하다.
9월에 명군은 총공격을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먼저 명군 제독 동일원의 중로군은 사천의 시마즈 왜군을 공격하였다. 중로군은 초반에는 승전보를 올리며 진격했다.
9월 20일에 명나라 선봉군이 진주 남강을 지키던 일본군을 급습하였다.
28일 밤에는 정기룡의 조선군은 이 정보를 알고 야습을 감행하자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천신성으로 들어갔다. 이후 일본군은 사천신성을 지키며 방어 전술로 일관했다.
명나라 동일원은 작은 승리에 취하여 10월 1일에 사천신성을 전면 공격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명군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대포까지 쏘았다.
그런데 악재가 터졌다.
명군 진영에서 유격 모국기 휘하 포병부대의 불랑기포가 과열하여, 파열된 포신으로부터 발생된 불꽃이 화약 더미에 옮겨붙어 폭발한 것이다. 이에 놀라 명군은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도 전에 우왕좌왕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않고 시마즈는 전 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하였다.
명군은 단번에 무너졌고 줄행랑쳤다. 동일원은 합천까지 도망쳤다.
중로군의 피해는 일본 측은 4만 명, 명나라는 3-4천명으로 추정하고,‘선조실록’에는 8천명 내지 1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편 제독 마귀가 지휘한 동로군은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합류하여 9월 중순에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 공격에 들어갔다. 마귀는 동래 온정에서 왜군 30여명을 베고 조선인 포로 1천 명을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토는 1597년 12월에 10일간의 조명연합군 공격에 성안의 우물 물이 부족하자 말의 피를 빨아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겨우 울산왜성을 사수한 전력이 있어, 왜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가토는 해자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 들임으로써 도산성 앞의 강을 건너기 어렵게 하였다.
이처럼 동로군의 공격이 난항을 겪을 무렵, 중로군의 명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월 4일에 마귀는 경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