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며
겨울을 지나며
  • 문틈 시인
  • 승인 2024.01.2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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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흘째 눈이 온다. 숲의 벌거벗은 나목들에도 눈이 쌓여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눈에 덮인 겨울이다. 대지는 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듯하다. 이 춥고 눈 덮인 겨울에 포롱, 포롱, 새들이 날아다닌다. 갑자기, 저 새들은 어디서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집 가까이 있는 작은 숲에도 새들이 날아온다. 거실 바로 앞 공터의 모과나무에도 이따금 꽁지가 긴 새가 날아왔다가 떠난다. 나는 공연히 새들의 안부가 걱정된다. 다람쥐처럼 가을에 먹이를 땅속에 양껏 쟁여 놓는 것도 아닐 터인데, 새들은 대체 무얼 먹고 사는지?

내가 직장 생활을 하던 어느 해 겨울, 눈이 무척 많이 내렸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겨울나기가 힘들었는지 어느 시골 마을에 고라니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인가로 내려왔다.

맨 처음 고라니를 발견한 한 할머니가 마당에 들어온 고라니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더러 ‘오랜만에 산고기 한번 먹게 생겼네요. 얼른 잡아먹읍시다’라며 채근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배고파서 내려온 불쌍한 짐승을 잡아먹을 순 없다며 거절하고, 겨우내 정성껏 보살펴서 봄이 오자 산으로 돌려보냈다.

사람들이야 창밖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 안에서 귤껍질을 까며 겨울을 감상할 수 있노라지만 새들, 산 짐승들은 겨울을 보내기가 무척 힘들 것만 같다. 맹추위, 폭설에 새나 짐승들도 지내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해마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빈 들판에 대대적으로 철새들에게 먹이를 뿌려 주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북국에서 이 땅으로 날아와 겨울을 보내는 귀한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행사다. 산 짐승들, 숲에 사는 새들에게도 먹이를 나눠주는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

곰이야 굴을 파고 들어가 동면한다지만 오소리, 고라니, 노루, 토끼 같은 귀여운 산짐승들은 겨울에 배고픔을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산새나 산짐승들과 진심으로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겨울이다. 우리가 보살펴 주면 그들도 되게 반길 것이다.

지금은 먹을 것이 풍요로워 굳이 새나 짐승들을 잡아먹지 않아도 좋은 때다. 하여, 겨울을 진화론적으로 우리 인간과 이웃 사촌뻘이 된다는 짐승들과 친해지는 기회로 만들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 것을 보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눈 핑계, 추위 핑계를 대며 꼼짝하지 않고 집 안에서 지내오다 직접 겨울 속으로 가보기로 한 것이다. 두텁게 쌓인 눈길 위로 내 발자국이 찍힌다. 어릴 적 산길에서 산짐승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천은 개울물의 양옆이 희게 얼음이 얼어 떠 있다. 그 밑으로 물살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한 걸음씩 개천가를 걷는다. 응달에는 땅바닥이 얼어붙어 빙판을 이룬 곳이 많다.

기온은 영상이라지만 개천가라 볼이 얼얼하도록 차갑다. 마스크를 하고, 털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었지만 우선 길바닥이 미끄러운 곳이 많아 엉금엉금 기다시피 몇십 분 걷고는 까딱하면 넘어질 수도 있어 되돌아섰다. 내가 겨울 손님이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오는 길에 나는 저 멀리 산을 바라보며 한참 서 있었다. 산에는 마치 성난 힘줄 같은 불룩불룩 솟은 산줄기들이 뻗어 있고 줄기를 따라 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정말 멋진 풍경이다. 나는 산이 곧고 힘찬 감정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겨울 산은, 특히 눈에 쌓인 산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저 산 계곡, 산 구비 어디마다 산 짐승들이 살고, 새들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도시는 사람을 보살피고, 산은 새와 짐승들을 보살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나는 멀리 있는 산봉우리 쪽으로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싶어진다. 고맙다, 감사하다, 아름답다, 하고. 겨울은 회색빛이다. 봄, 여름, 가을처럼 화려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연과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계절이다. 지금 우리가 얼어붙은 자연에 손길을 내뻗는다면 자연은 뒤에 올 다른 계절에 따스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거실 창 난간에 새 모이를 담은 그릇을 놓아두자고 해야겠다. 그 생각만으로 갑자기 행복감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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