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11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유정(劉綎)이 순천(順天)의 적영(賊營)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고니시의 왜군)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行長 고니시)이 순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하고, 순신은 진린(陳璘)과 해구(海口)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泗川)의 적 심안돈오(沈安頓吾 시마즈)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賊船)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南海) 경계까지 추격해 이순신이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린이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고,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그랬다. 이순신의 유해는 관음포에서 가까운 남해 충렬사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바닷길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완도 고금도로 이송되었다.
고금도에서 이순신 유해는 80여일 간 머문 후에 충청도 아산으로 향하였다.
운구 도중에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통곡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선비들은 제물을 차리고 제문을 지어 곡을 하였는데 슬퍼하기를 마치 친척의 죽음 맞이하듯이 하였다.
1599년 2월 11일에 이순신은 충남 아산 음봉면 금성산 밑에 묻혔다. 묘터를 잡아 준 이는 풍수지리에 능했던 명나라 무장 두사충이었다.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한 두사충은 진린의 처남인데 이순신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 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를 써주었는데 시는 이렇다.
北去同甘苦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 아래
今日一盃情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전쟁이 끝나자 두사충은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한 다음 압록강까지 배웅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그대로 귀화하여 대구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는데, 이는 대구 남구 대명동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이순신은 1614년(광해군 6)에 어라산 아래로 이장되었는데 지금 묘소사 있는 곳이다.
묘소 앞에는 신도비가 두 개 있다. 묘소로 들어가는 길머리에는 김육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고, 묘소 바로 밑에는 정조 임금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정조는 이순신의 공로를 우리 억만년 동국(조선)을 다시 회복한 것이라고 칭송하며 신도비에 이렇게 썼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수비하면 반드시 보전하여 나라의 운명이 공(公)의 동작에 따라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적의 칼날은 그 때문에 꺾어져서 마침내 여러 곳에 소굴을 짓고 날뛰던 간교한 놈들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느라고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어, 우리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또 다른 기초가 더해진 것은 오직 이순신 이 한분의 힘이라.내 이제 이순신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가 비명을 쓴다 하랴.”
(김종대 지음,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p 348- 350)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