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에서 먹는 맨날 똑같은 식단이 물려서 점심때 바람도 쐴 겸 가끔 가는 초밥집을 찾았다. 이 집은 요즘의 엄청난 불경기에도 손님이 늘 있다. 깔끔한 상차림도 마음에 들고, 우선 값이 비싸지 않아서 인기가 있는 듯하다. 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우리는 점심 식사로는 가장 싼 메뉴인 1인분에 10,900원짜리 초밥을 주문했다. 그래도 주요리 전에 메일 국수가 두 덩이 나오고, 초밥이 7조각, 새우 고구마튀김이 잇달아 나와 맛을 풍성하게 한다.
반찬은 식탁 위 유리병들에 생강, 마늘 대가리, 그리고 단무지를 담아 놓아 집어내 먹게 되어 있다. 나는 혀에 감도는 쌉쌀한 생강 맛을 좋아해서 조금 더 먹는 편이다. 가격과 맛이 딱 맞는 듯해서 늘 만족해한다.
머리에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쓴 초밥집 매니저인 듯한 사람이 식사를 다 마칠 무렵 연어구이라며, 직접 한 조각씩 식탁으로 내왔다. 서비스란다. 공손히 말하기를 자주 찾아와 주어서 감사한 표시로 저녁 식사에만 올라오는 연어를 서비스로 내왔다고 한다.
순간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우리를 알아보고 특별 서비스 음식을 내 온 것은 고맙긴 했지만 내 감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식당의 서비스에 대해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어 조각을 서비스로 준 것은 고마웠지만 식당에서 우리를 알아본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어. 내가 비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조용히 식사하고 돌아오고 싶었는데 ….”
그러자 아내가 날더러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고 자기도 그랬단다. 식당에서 우리를 알은체한 것이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저 여러 손님 중 한 사람으로 익명으로 식사만 하고 돌아오는 그런 소박한 동선에 매니저가 흠집을 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돈 낸 것만큼만 먹는 것이 마음 편하지 특별히 거기에다 무엇을 서비스라고 더 갖다주는 것도 아무리 감사 표시라지만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가장 싼 것을 시켜 먹어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아내와 나는 그 식당이나 매니저에게 불만을 표시한 것은 전혀 아니고 우리가 단지 식당 쪽에서 알은체한 것이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이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내가 말하기를 요즘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지금 막 우리가 의견의 일치를 본 그런 감정과 결이 비슷한 장면, 마트나 편의점 같은 데서 종업원이 알은체하면 다시는 그 가게에 가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며 이야기를 가지 쳐 나갔다.
그래요? 아내의 말인즉슨 그것이 요즘 말하는 엠지(MZ) 세대의 익명 속에 살고 싶어 하는 심리란다. 옛날에는 식당에서 알은체해주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간 일행들이 있으면 우쭐한 느낌마저 들었었다. 이런 좋은 식당에 오래전부터 단골로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제발 나를 모른체 하는 것을 바란다. 가게 종업원이 내가 고마워도, 그렇지 않아도 나를 모른체 하는 것을 나는 바라게 되었다. 아내가 말했다. “무인점포가 늘어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어요.”
그렇긴 하지만 세상을 탓해야 할 것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알은체하고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내게서 찾아보려 애썼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연히 아파트 옆집 아주머니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나이 들어가는 표정인지도 모른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달에 두세 번 마주칠 정도로 우연이 잘 겹치지 않는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더 나가버리고 말았다. '잘 지내시지요?'
그러고는 나는 곧 엄청나게 후회했다. 보통 잘 하지 않는 언사다. 아주머니도 속으로 당황했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알은체를 해버린 것이다. 옆집 사람과 마주치면 ‘안녕하세요’에서 멈추어야 한다.
다음에 그 초밥집에 갈 때는 그 매니저의 시야각에서 벗어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자는 내 말에 아내는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