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미술관기행[1회]-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렘브란트(‘눈먼 삼손’)
김세곤의 세계미술관기행[1회]-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렘브란트(‘눈먼 삼손’)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4.07.09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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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니스트

24년 3월30일부터 4월10일까지 12일간 아내와 함께 독일·프랑스·스위스 3개국을 자유 여행했다.
3월 30일 오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입국 하여 31일에 프랑크푸르트 여행을 했다.

여인의 초상화(자화상 포함)

오전에는 괴테하우스(생가), 오후엔 슈테델 미술관(Städel Museum)를 관람했다. 입장료가 18유로인데, 52유로에 ‘부부 박물관 티켓’을 구입하니 무료 입장이었다.

여인의 초상화
여인의 초상화

곧바로 미술관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의 대형 그림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전시실에 들어가니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이 여러 점 보인다. 자화상, 여자 초상화 등이 걸려 있다.

눈먼 삼손
눈먼 삼손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1636년에 그린 ‘눈먼 삼손’이다.
삼손은 『구약 성서』 「판관기(개신교는 사사기士師記)」 13장~16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그리스·로마신화의 헤라클레스와도 비교되는 초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블레셋 추장에게 매수된 정부(情婦) 들릴라의 꾐에 빠져

들릴라에게 한 번도 깎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괴력의 원천임을 알려주었고, 들릴라는 삼손이 잠자는 중에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다.
힘을 잃어버린 삼손은 블레셋 병사들에 의해 두 눈이 찔린 채 장님이 된다. (판관기 제16장)

그러면 ‘눈먼 삼손’ 설명문부터 살펴보자.
설명문은 독일어와 영어로 되어 있다.

“얼마나 잔혹한 그림인가! 하느님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판관 삼손에게 부여한 초인적 힘은 한 번도 자르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었습니다. 삼손의 정부(情婦) 들릴라는 삼손을 꾀어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들릴라는 동족인 블레셋 병사들을 불렀는데, 블레셋 병사들은 삼손을 꽁꽁 묶고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들릴라는 승리·매혹·혐오의 표정으로 희생자인 삼손을 뒤돌아봅니다. ”

‘눈먼 삼손’ 설명문<br>
‘눈먼 삼손’ 설명문

그림은 끔찍하게 눈 찔리는 영웅 삼손의 몰락이다. 빛은 나약하게 드러누워 눈 찔린 삼손을 스포트라이트 하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7명이다. 삼손과 들릴라 그리고 블레셋 병사 5명.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들릴라는 오른손에는 가위, 왼손에는 삼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려 삼손을 보며 뒷걸음치고 있다.
블레셋 병사는 단검으로 삼손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한 병사는 삼손의 목을 잡고 있으며, 또 한 병사는 쇠사슬로 삼손의 오른손을 감고 있다. 두 병사는 칼과 창을 겨누고 있다.

1636년에 그린 이 그림은 헤이그 궁정 오라니에 공의 비서인 호이겐스에게 선물한 것이다.
렘브란트는 22세인 1628년부터 호이겐스와 인연을 맺었고, 헤이그 궁정은 호이겐스를 통하여 렘브란트 그림을 구해 영국 왕 찰스 1세에게 선물하였다.

1631년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렘브란트는 1632년에 외과 의사 길드 회원들의 주문으로 단체 초상화 ‘툴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그렸는데, 이 그림으로 렘브란트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날렸다. 1633년부터 인물화 주문이 쇄도하였고 1634년에 렘브란트는 레바르덴 시장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하였다.

29세인 1635년엔 유대인 거주 지역에 있는 초호화 저택을 샀다. 그는 방탕하면서 초호화 생활을 하였지만 이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렘브란트는 성서와 관련하여 많은 명화를 남겼다.
필자가 2018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박물관에서 관람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34년)’,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1635년), ‘돌아온 탕자(1668~1669년)’는 모두 감명 깊은 성화(聖畫)였다.

말년의 렘브란트는 비참했다.
아내도 죽고 파산하여 빈민가에서 살았고, 식사는 빵과 치즈, 절인 청어가 전부였다. 1669년 10월 4일에 렘브란트는 63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젤에는 ‘아기 그리스도를 안은 시몬’이 미완성인 채로 걸려 있었다. 유족이라곤 15세의 딸과 1살도 채 안 된 손녀뿐이었다.
10월 8일에 렘브란트는 조문객 없이 암스테르담의 서쪽 베스테르케르크 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한편 슈테델 박물관은 1905년 5월에 비엔나의 한 가문 소유의 그림을 구입하였는데, 처음에는 가격이 336천 마르크라서 엄두도 안 났지만 며칠만에 85명이 167,700 마르크를 기부하여 구입이 가능했다.(설명문 참조)

( 참고문헌 )
o 허영엽, 성서의 숲에서 사람 향기에 취하다 1, 이유, 2002. p 135-139
o 스테파노 추피 지음 ·한성경 옮김, 렘브란트 네델란드 미술의 거장, 마로니에 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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