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비 온 뒤
  • 시민의소리
  • 승인 2024.07.2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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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숲속 길을 따라 맨발 걷기를 하다가 넘어져서 발바닥에 상처를 입었다. 그 후로 상처가 아무는 동안 걷기를 하지 못했다. 여러 날이 지나 상처가 아물었지만 마침 계절이 장마로 접어든 데다 덥고 습해서 걷기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 나가는 것이 버릇되어버려 집에서 웅크리고 지내다가 오늘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개고 하늘이 푸른 모습을 보여 맨발 걷기 대신 아침 일찍 신발 끈을 묶고 산책을 하려고 밖에 나갔다. 전에 자주 가던 개천은 며칠째 내린 비로 물이 불어 거센 물결을 굽이쳐 굉음을 내며 무섭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발길을 끊고 있던 사이에 하천 공원 길가에는 해바라기들이 떼 지어 피어 여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자체에서 해바라기를 무더기로 심어 놓았다. 고추잠자리들도 신이 나서 공중으로 나와 서로 비행 솜씨를 보여주느라 바쁘다.

개천에서 갈라진 샛강으로 물오리들이 줄지어 행렬을 지으며 나아간다. 내가 집에서 칩거하고 있는 동안 산천은 훌쩍 키가 커버린 아이를 오랜만에 만날 때처럼 경이로웠다. 나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마치 두 발로 걷는 것이 처음인 것처럼 보행의 기쁨을 새삼 느꼈다.

비로 씻긴 산천이 내게 생명의 약동 같은 느낌을 준 탓인가보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형상 가운데 가장 잘 고안된 작동 방식이다. 인간이 두 발로 걷지 않는다면, 하고 생각해보면 두 발로 걷기는 축복과도 같은 동작이다.

개천물을 바다로 보내는 힘, 그리고 내 두 발을 걷게 하는 힘은 어쩌면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신비로움을 느낀다. 여러 날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풍경은 한결 말갛고 깨끗해 보인다. 이제 막 페인트칠을 마친 산뜻한 그림 같다.

나무들은 짙은 푸르름으로 아우성을 지르는 듯하다. 무성한 푸르름이 한여름의 절정을 보여준다. 나무들도 찌는 듯한 더위를 느끼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아침부터 매미들이 목이 터지라고 나무들 대신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것 같다. 나무들이 매미를 시켜 내지르는 소리.

나무들이 갈증을 느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물기가 모자라면 나뭇잎들은 시들시들해진다. 나는 거실에 있는 센실베이리아, 뱅갈고무나무 화분에 물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만일 내가 깜빡 잊고 물 주기를 게을리하면 나무는 거실 바닥에 시든 잎을 떨어뜨린다. 산천의 비 대신 내가 물을 대주는 것이다.

비가 오는 과정은 과학적으로 잘 해명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비는 대지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인 하늘의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대지가 태양의 포옹을 받아 불덩이처럼 달구어져서 기갈이 들어 몸부림칠 때 하늘은 흩어져 있는 구름을 모아 비를 내리는 것이다.

과학이 무어라 하든 나는 그렇게 하늘과 땅이 맺은 질서 속에서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오고, 태양이 뜨겁게 대지를 달굴 때는 그렇게 하고, 이것들이 다 오랜 약속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비가 오고 난 뒤, 마치 대청소를 해 놓은 듯 풍경은 한결 깨끗해 보이고, 대자연의 첫날이 이랬을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꼬리가 긴 새 한 마리가 개울을 건너 저 쪽으로 날아간다. 나무, 새, 잠자리, 나비, 꽃, 모든 여름날의 생명체들은 분명히 비 온 뒤에 몹시 기꺼워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자연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비가 온 뒤 더욱 선연해 보인다. 나는 생동감 넘치는 자연에 감응하여 절로 여름 아침을 찬양한다. 여름날의 푸르름을 더욱 푸르게 하는 비와 비가 그친 뒤 생명을 구가하는 모든 것들의 절정을 내 몸으로 느낀다. 이 순간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생명력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부터는 건강도 돌볼 겸 맨발 걷기는 삼가더라도 자주 산책을 하자고 다짐했다. 이 얼마나 생동하는 대자연인가. 대강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내가 본 여름 아침을 이야기하자 아내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며 두려워한다. 7월은 여름의 예고편이고, 본편은 8월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해마다 더운 여름나기를 힘겨워한다.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별로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다. 더위를 알아차리는 몸의 신경계가 오작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산천경계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비 온 뒤 여름날의 산천은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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