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선선해졌다. 가을이 여름 뒤에서 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듯하다. 여름에게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재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은 아직 짐을 꾸려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낮의 불볕더위는 여전히 지속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세계가 여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듯했다. 여름을 성토하고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들려도, 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태양의 모습이 달라진 것 같다. 매일 아침 조금씩 늦게 산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여름에게 물러날 때가 됐다며 보내는 신호다.
이른 아침, 숲길로 들어선다. 한 달 넘게 매일 맨발 걷기를 해오고 있다.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면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대지의 기운이 몸으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어싱(Earthing)’ 같은 신기한 말에 혹하지 않는다. 어릴 적 추수한 벼를 말리기 위해 벼 사이를 맨발로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팔에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내일부터는 긴소매를 입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풀섶에서 풀벌레들이 울어댄다. 야단법석을 떨던 매미들은 이제 허공에 소리를 퍼 올리고는 일제히 사라졌다. 밑바닥에서는 가을의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오고 있다. 풀벌레들의 작은 소리로 가을의 전령 역할을 하는 것이 반갑다.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다. 나는 이슬을 가을의 보석이라 부른다. 풀잎에 손을 대면 이슬이 금방 산산이 부서지지만, 이슬방울 속에 아침 햇빛이 담겨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안타깝게도 누구에게도 선물할 수 없다.
옛사람들은 이슬을 사람의 삶에 비유했다. 잠시 찬란하게 반짝이지만 금방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슬은 실재하지만, “너냐?” 하고 물으면 즉시 사라져 버린다. 이슬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은 없다. 그 끝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일까. 아니, 이슬은 연구 대상이 아니다. 그저 순간 아름다울 뿐이다.
맨발 걷기 길은 작은 조롱길이다. 지자체가 조성한 길이 아니고, 옛날부터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길이다. 나처럼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친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그 외에는 아무 대화도 없이 스쳐 지나간다. 맨발 걷기의 동행자들이다.
건강에 좋다고 하니 굴곡진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는다. 맨발 걷는 이들을 보면 살기 위해 사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렇다.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면 길 위를 네 발 걷기라도 불사할 것이다.
나는 걷기를 좋아하므로, 땅에 닿는 발바닥의 촉감이 힘이 되는 것 같아 매일 아침 맨발 걷기를 거르지 않는다. 실제로 좋은지는 모르지만, 도시에서 포장도로를 구두를 신고 다니기만 하던 시절과는 다른 경험이다. 대지의 살을 맨발로 느끼는 순간이 세상의 고달픔을 잊게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자처럼, 세속에서 멀어지고 종요로울 지경에 있는 듯하다. 길바닥에 뾰족한 유리 조각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 회사 출근, 아르바이트, 약속 등으로 바쁜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맨발 걷기 길목에서 여름의 변두리를 포위하려는 듯 다가오는 가을의 기척을 느낀다. 이 시간이 참으로 온전히 행복하다.
맨발 걷기를 마치고 숲길을 빠져나오면, 풀밭 사이로 난 길로 돌아온다. 그때, 맨발로 이슬이 맺힌 푸른 풀밭 위를 걸으면 행복감은 절정에 달한다. 풀잎 끝에 반짝이는 이슬들이 발바닥에 젖어 들고, 딱딱한 흙길에서 부드러운 풀밭 위로 걸으며 나의 맨발 걷기는 끝난다.
오늘 나는 가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듯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남의 집을 방문할 때면 대문 앞에서 맨 기침을 하셨다. 그러면 집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주셨다. 이제 계절의 맨 기침 소리가 들리니, 곧 가을이 여름의 집으로 들어올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