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지켜본 일이 있다. 흰 나비는 아파트 울타리를 넘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아까 왔던 자리로 날아온다. 나비는 새나 벌처럼 곧추 날아가지 않고 갈팡질팡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인다. 가는 길이 분명하지 않아 보이고 어른거리며 날아간다.
그 측량할 수 없는 비상은 아마도 천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일 게다. 매우 특이한 움직임이다. 나비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불안스럽다. 마치 울퉁불퉁한 길을 위태롭게 가는 것 같다. 나비는 공중을 그런 식으로 날아야 혹시 자기가 찾는 꽃의 식별이 잘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비는 그러다가 멀리서 날아온 다른 나비를 공중에서 만나 둘이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몇 번 하고 나더니 다시 헤어져 각자 다른 길로 난다. 아마도 최신 정보 교환을 하거나 환영 인사를 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짝짓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시야 안에서 날고 있는 나비를 계속 주시한다. 대체 나비는 무엇을 찾아 저리 날고 있는 것일까. 나비는 찾으려는 것을 아직 못 찾았는지 계속 날다가 웃자란 어느 풀잎에 가서 날개를 접고 앉는다. 앉아서 숨을 몰아쉬듯 두 날개를 포갰다가 폈다가 한다. 나는 것이 힘겨워 잠시 쉬는 것일지도 모른다.
9월도 하순에 가까운 이른 아침, 흰 나비 한 마리가 내가 걷는 놀이터 모래밭 풀섶에서 날고 있다. 주위엔 꽃도 다 지고 게다가 가는 빗방울이 듣고 있다. 저 나비는 어인 일로 이 아침 일찍 날고 있는 것일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한참 바라보았다.
나비는 풀잎에 내려앉더니 곧 다시 날기 시작한다. 혹시 길을 잃은 것일까. 다른 풀잎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내가 도울 방법은 없다. 주변에 다른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지켜 본다. 내 마음이 점점 초조해진다.
걷기를 마치고 그 자리로 돌아가니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나비가 길을 찾아가려 했던 길로 날아갔기를 바랐다. 방금 나비에게 일어난 이 작은 일을 우주는 알고 있을까. 알껍데기를 갉아 먹으며 밖으로 나온 애벌레는 네 번의 허물을 벗는 동안 자기 몸의 8만 배에 달하는 풀잎을 갉아 먹는다.
애벌레 상태에서 나뭇잎을 돌돌 말아 네 차례의 변신을 겪고 나서 마지막 번데기 형태로 있으면서 겨울을 나고 봄에 날개 펼친 모습으로 우화한다. 여름이나 가을에도 같은 과정으로 나타나는 나비들도 있다. 놀라운 변신과 비약이다. 화려한 날개, 고운 색깔, 아름다운 무늬로 눈부신 모습으로 치장한 나비가 기적처럼 탄생하는 것이다. 무려 네 번이나 허물을 벗는 과정을 거쳐서 말이다. 상상이나 가는가?
나비를 볼 때마다 나는 자연이 하는 일에 경이를 느낀다. 허물을 네 번 벗고 번데기가 되어 기다리다가 홀연히 세상 밖으로 나비가 되어 나오는 그 힘들고 긴 여정을 생각해보라. 마치 나비처럼 아름다운 생명으로 탄생하려면 자신의 허물을 벗고 또 허물을 벗고 나야 순수한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기에 나비는 그렇게도 찬란한 모습을 하고 나오는가 싶다. 절로 숙연한 마음이 된다. 나비에게 무슨 허물이 더 남아 있겠는가. 나비는 절대한 순수 그 자체다. 나비는 그 두 날개에 우리가 지금껏 해석하지 못하는 상형문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무늬들은 수천, 수만 가지다.
‘반으로 접힌/사랑의 편지가/꽃의 주소를 찾고 있다’(쥘 르나르)라고 한 작가는 그 메시지를 사랑의 편지라고 멋지게 말한다. 그런가 하면 ‘태양으로부터 생겨나온 나비들’(나보코프)이라고 나비의 눈부심을 유명한 작가는 쓰고 있다.
나는 그렇게 멋진 말을 못 하지만, ‘나비와 코끼리 생명의 무게는 같다.’라고 쓴다. 나비는 ‘자연의 혼령’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나는 함부로 나비를 채집하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지난 여름방학 때 아이들이 나비를 잡으러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심란한 심사가 되었다.
나는 속으로 “얘들아, 누가 커다란 채로 너희를 잡으러 온다면 어떡할래?”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비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다. 나비는 언제나 자연이 내준 길로 간다. 아무도 나비의 길을 막을 권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