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보여주는 것들
가을이 보여주는 것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24.09.2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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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흔히 나를 사색에 잠기게 한다. 휘영청 밝은 달이 창가를 비추면,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진 빈 들판, 추수를 끝낸 후 남겨진 적막한 풍경이 마치 내 인생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무엇인가를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오히려 텅 빈 허전함이 더 크게 안겨 오는 것은 이때다.

가을이 주는 이 묘한 고독감은 진정 무엇일까? 가을은 마치 아물지 않는 상처 같은, 내 마음에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빈 들판을 벗어나 강가로 걸음을 옮기면, 그곳에서는 야윈 강물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득 불어나 있던 물이 줄어든 가을 강은 내 마음속 옛사람의 추억을 싣고 흘러간다.

한때는 넘쳐흐르던 감정도,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조금씩 마르고 사라지는 것일까. 그 강물 위로, 아무런 슬픔이 없어 보이는 물새들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저들은 그 무슨 고민 같은 것도 없는 듯, 그저 가을 하늘의 높이를 재는 듯하다.

옛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가을 탓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 사람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내가 당신은 영원한 오직 하나뿐인 존재라고 말했던가.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던가. 그 열정의 시간을 뒤로 하고 그 사람은 쓸쓸히 가을 길에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때는 그 말이 너무도 차갑고 너무나 가슴 아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가을이 와서 보여준 것처럼, 여름의 무성한 열정은 끝나고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가을 코스모스 길도 또렷이 떠오른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길을 말 없이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며 걷던 그 시간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빛나는 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 사람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을밤에 나는 가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답 없는 질문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 환한 가을 밤하늘은 무한한 우주를 품고 있고, 그 안에서 나는 마치 한 잎, 가을 잎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가을 잎은 낙하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천지가 떠받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강렬한 햇볕과 거친 바람, 폭우 속에서 가을 잎은 제 할 일을 마치고 떨어진다. 떨어져서 비로소 가을 잎이 된다. 가을이 주는 이 깊은 고독감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어떤 하나의 답도 찾을 수 없다.

나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깊은 밤 가을 산에 떨어지는 것들을 상상했다. 툭, 툭, 밤송이도, 도토리도, 내 마음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그저 가을의 한가운데 몸을 맡긴 채, 밤이 새도록 쓸쓸히 생각에 잠겨 든다.

산에서는 모든 열매가 여물어 떨어지고, 낙엽들도 우수수 바람에 흩날려 땅으로 내려앉는다. 모든 것이 끝나고 이제 한 해의 끝을 보여주는 빈 숲을 걷던 날, 나는 문득 거대한 외로움에 안겨들었다. 그 순간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울어 주지 않은 나를 두 팔로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왔지만, 그 눈물의 의미를 묻기엔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자연은 왜 나를 이 별에 초대했으며 왜 나를 가을 잎처럼 언젠가는 떨어지게 하는 것일까. 가을은 생각할수록 난해한 질문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그저 아득히 먼 가을 길을 젊은 날의 내가 걸어간다.

가을은 내게 언제나 고독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그 고독은 천상천하 절대 고독이다. 숲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사람도 결국은 무언가를 쥐었으나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내게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계절이다.

쓸쓸하고 허전하지만,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절대한 나 자신만의 고독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을은 세상의 끝을 보여 주지만 그 끝에서 떨어져 땅속에서 잠자는 도토리처럼 나는 또 다른 여정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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