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구상나무는 또 다른 '오름'
눈 덮인 구상나무는 또 다른 '오름'
  • 장갑수
  • 승인 2005.01.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라산 윗세오름(1,714m, 제주도)
▲ 병풍바위 ⓒ장갑수 제주도는 오름 왕국이다. 봉긋봉긋 솟은 모습이 거대한 고분 같기도 하고 여성의 젖가슴 같기도 하다. 육지의 산만 보고 자란 사람이 제주도의 오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한라산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늘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면 360개에 이르는 오름들은 늘 품에 안기고 싶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오름 주변에 마을을 세웠고, 오름에 기대어 밭을 일구고 목축을 하였다. 죽어서 묻히는 곳도 역시 오름이었다. 제주에서 어리목으로 달리는데도 수많은 오름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구상나무나 소나무 같은 상록수에 핀 설화는 함박꽃이고, 잎이 없는 잔가지에 핀 설화는 만발한 벚꽃이다. 나는 이러한 설국에서 해맑은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나무줄기의 회색과 하얀 눈꽃이 만든 풍경은 한 폭의 수묵담채화다. 담채화는 그 어떤 화려한 색상의 그림보다 아름답다. 나는 아름다운 수묵담채화에 마음을 빼앗긴다. ‘닥터지바고’처럼 눈길을 걸으며 ▲ 눈사람이 된 구상나무 ⓒ장갑수
울창한 숲은 갑자기 앞이 트이면서 초원지대가 나타난다. 사제비동산 오름길이다. 사제비동산으로 불리는 사제비오름에 쌓인 눈이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동산이다. 가끔 눈사람이 된 구상나무가 솟아 수평과 수직의 조화를 이룬다.

숲이 없는 오름의 바람은 얼마나 센지 가만히 서 있어도 자동으로 움직여진다. 괴성을 내며 휘몰아치는 바람은 더 이상 정다운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경계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금방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도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런 눈길을 걷는 나의 모습이 영화 닥터지바고가 살인적인 눈보라를 견디며 시베리아 벌판을 걷는 것 같다.

만수동산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데, 웬만한 나무는 눈 속에 묻혀버렸고 가끔 보이는 키 큰 구상나무들만이 눈사람이 되어 어렵게 버티고 있다. 늦은 봄이면 털진달래꽃이 붉게 피어 장관을 이룰 모습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앞서가는 몇 사람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원정대 같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걷는 발걸음에는 헛된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무념무상의 경지다. 저 앞으로 보이는 윗세오름대피소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영실기암에 얽힌 전설

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곧바로 영실로 하산을 시작한다. 윗세오름에서 서북벽을 통하여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는 바람을 등지고 왔는데 이제는 정면으로 맞아야 하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몸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바람은 나를 위해서 멈추어주지도, 풍속을 늦추어주지도 않는다. 노출이 된 콧등이나 얼굴부위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게다가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다.

   
▲ 고목에 핀 눈꽃 ⓒ장갑수
병풍바위 쯤 내려오니 바람 끝이 조금은 무디어졌다. 눈보라가 몰아치다가 가끔 그치면 순간적으로 주변의 오름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버린다. 잠깐 보는 오름들의 부드러움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병풍바위 건너편으로 오백나한이 신령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영실계곡 상부에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오백나한에는 여기저기에 빙폭이 형성되어 더욱 절경이다. 영실기암, 오백장군이라고도 불리는 오백나한에는 설문대할망과 아들 5백 형제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설문대할망은 힘이 세서 삽으로 흙을 떠서 일곱 번 던졌더니 한라산이 되고, 신고 다니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 한 덩이씩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설문대할망은 어느 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바다에 나간 아들들에게 주려고 큰 솥에 죽을 쑤다가 발이 미끄러져 솥에 빠져죽고 말았다. 밤늦게 돌아온 아들들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허겁지겁 죽을 먹었다. 죽을 맛있게 먹은 뒤 솥 밑바닥에서 어머니의 나막신이 나오자 그제서야 어머니를 먹어치운 것을 안 아들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자결하여 바위로 굳어졌다. 그것이 바로 영실기암이다. 

병풍바위의 웅장한 모습도 가관이다. 수백 미터의 거대한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바위가 영실계곡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오백나한을 거느리는 부처 같기도 하다. 수묵담채화만 보다가 갑자기 붉은 적송 숲이 나타나니 유난히 화려해 보인다. 하얀 눈 속에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쭉쭉 뻗은 적송 숲은 더욱 고고해 보인다.

▷산행코스
 -. 어리목(1시간 30분) → 사제비동산(1시간) → 윗세오름대피소(40분) → 병풍바위(40분) → 영실(40분) → 영실매표소 (총소요시간 : 4시간 30분)

▷가는 길
 -. 제주시내에서 중문 쪽으로 달리다가 1100도로를 따라 달리면 어리목과 영실로 이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