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윗세오름(1,714m, 제주도)
숲이 없는 오름의 바람은 얼마나 센지 가만히 서 있어도 자동으로 움직여진다. 괴성을 내며 휘몰아치는 바람은 더 이상 정다운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경계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금방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도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런 눈길을 걷는 나의 모습이 영화 닥터지바고가 살인적인 눈보라를 견디며 시베리아 벌판을 걷는 것 같다.
만수동산에서 윗세오름으로 오르는데, 웬만한 나무는 눈 속에 묻혀버렸고 가끔 보이는 키 큰 구상나무들만이 눈사람이 되어 어렵게 버티고 있다. 늦은 봄이면 털진달래꽃이 붉게 피어 장관을 이룰 모습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앞서가는 몇 사람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원정대 같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걷는 발걸음에는 헛된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무념무상의 경지다. 저 앞으로 보이는 윗세오름대피소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영실기암에 얽힌 전설
대피소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곧바로 영실로 하산을 시작한다. 윗세오름에서 서북벽을 통하여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는 바람을 등지고 왔는데 이제는 정면으로 맞아야 하니 보통 고역이 아니다. 몸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바람은 나를 위해서 멈추어주지도, 풍속을 늦추어주지도 않는다. 노출이 된 콧등이나 얼굴부위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다. 게다가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다.
▲ 고목에 핀 눈꽃 ⓒ장갑수 | ||
설문대할망은 힘이 세서 삽으로 흙을 떠서 일곱 번 던졌더니 한라산이 되고, 신고 다니던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 한 덩이씩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설문대할망은 어느 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바다에 나간 아들들에게 주려고 큰 솥에 죽을 쑤다가 발이 미끄러져 솥에 빠져죽고 말았다. 밤늦게 돌아온 아들들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허겁지겁 죽을 먹었다. 죽을 맛있게 먹은 뒤 솥 밑바닥에서 어머니의 나막신이 나오자 그제서야 어머니를 먹어치운 것을 안 아들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자결하여 바위로 굳어졌다. 그것이 바로 영실기암이다.
병풍바위의 웅장한 모습도 가관이다. 수백 미터의 거대한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바위가 영실계곡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오백나한을 거느리는 부처 같기도 하다. 수묵담채화만 보다가 갑자기 붉은 적송 숲이 나타나니 유난히 화려해 보인다. 하얀 눈 속에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쭉쭉 뻗은 적송 숲은 더욱 고고해 보인다.
▷산행코스
-. 어리목(1시간 30분) → 사제비동산(1시간) → 윗세오름대피소(40분) → 병풍바위(40분) → 영실(40분) → 영실매표소 (총소요시간 : 4시간 30분)
▷가는 길
-. 제주시내에서 중문 쪽으로 달리다가 1100도로를 따라 달리면 어리목과 영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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