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 , 귀주마을 주민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오늘 점심때 별이네가 식사를 대접한다고 하오니 한분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나오셔서 함께 드시기 바랍니다.”
새벽안개 사이로 마을회관의 확성기에서 이장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면서 맑게 들려온다. 이곳
사람들은 결혼과 같은 경사가 있을 때면 먼저 동네 잔치판부터 벌여서 음식을 나누고 난 뒤에 식장으로 떠난다. 그때마다 이장의 목소리가 확성기
속에서 신이 난다. 확성기가 산방쪽으로 나있어서 또렷하게 잘도 들린다.
장마철인데도 불구하고 다행히 아침밥을 먹고 나니 안개는
걷히고 해살이 찬란하게 비친다. 별이네 할머니랑 친척들이 벌써부터 음식상을 준비하느라 그런지 바쁜 걸음으로 산방 담 옆으로 오고간다. 별이
할머니는 지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점심때 꼭 오라고 당부하고는 잰걸음으로 길 모퉁이를 돌아선다. 아이들은 일의 성격과 상관없이 손님들이 많이
오는 큰일이 닥치면 무조건 즐거워하기 마련이다. 별이가 그렇다. 폴짝폴짝 잠옷 바람으로 뛰어 다니는 게 신나는 모양이다.
정오가 되기도 전에 뒷집 아주머니가 담 너머로 부른다. “안오실까바서 일부러 댈러 왔쇼”라면서
바로 오라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회관에 가서 먹을 요령으로 점심밥을 해놓지 않았다. 혼자 밥해 먹는다는 게 늘 그런 터라서 뒤따라 나섰다.
햇볕이 지독하게 따가워 몇 발자국 걸으니까 벌써 등에 땀이 흘러내린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산방에서 100미터 남짓 떨어진 회관 양쪽의 방과
거실에까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 앉아서 벌써 만찬에 들어갔다. 눈이 마주친 군의원이 자기 옆에 앉으라고 권한다.
상에 빼곡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을 대하면서 맛 있겠다 보다도
더운데 마련하느라 수고 했겠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이것저것 정성이 담긴 음식들을 둘러보면서 먼저 숟가락이 가는 곳은 다슬기국이다. 푸르스름한
국물에 애호박을 썰어 넣은게, 쓰린 속을 풀어주던 해장국으로 즐겨 먹던거라서 저절로 숟가락이 간다. 섬진강 이 일대에서 자라는 다슬기는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맛과 시원한 국물 맛을 지니고 있다. 문득 저운과 택준 생각이 나고 미안하다. 갈담 장터에 다슬기탕 맛있게 하는 곳이
있으니까 사주겠노라고 공수표만 띠고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약속인 까닭이다.
모두들, 차린 손의 정성만큼이나 맛있고 즐겁게
먹는다. 거의 다 먹을 때쯤 해서 수박을 내 놓는다. 수박을 먼저 손에 든 용동에서 온 친구가 내 좌편에 앉아 있는 양씨한테 말을
건넨다. “아제, 보리쌀 안 살라요? 5k에 8천원인가 한다는거 같던디요”라고 말하자, 양씨는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 “안 사, 그놈의 보리밥
크면서 질리게도 먹었는디 또 먹으란말여?” 그러자 그 이야기는 그냥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요즘 나는 보리밥을
즐겨하지 않는다. 웰빙 식품 이라고들 그러지만 나에겐 반갑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먹었던 그 밥이 아직도 싫다. ‘추억’어쩌고 하기엔 좀
꺼끌꺼끌한 기억들... .
이런저런 모습 속에 있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섬진강 따라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 사람들의 삶이, 강가
풍경처럼 넉넉하기를. 별이 할머니처럼 꿋꿋하기를.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