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한 강] 장지에 수묵담채 51cm x 105cm ⓒ 송만규 | ||
이 안개는 변덕스러운 것일까? 자유스러운 것일까?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마당 왼쪽에 있는 감나무에 붙어서 한동안 포옹을 하다가는 살그머니
흘러서 은행나무 높은 가지에 매달렸다가 달아나기도 한다. 앞산이 보일락 말락 할 때쯤 가벼운 옷차림과 간단한 화구를 챙겨서 강으로 향했다.
이때가 새벽강의 정취를 느끼기에 가장 좋아서이다.
많은 비가 내렸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강가에 다가섰다가 순간,
당황했다. 물살이 너무 사나워지고, 불어난 물로 강폭은 더 넓어진 것이다. 낮으며 고요하고 유유하기만 하던 섬진강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물위에
띄워 놓았던 바위들을 삼켜 버렸다.
한참 키가 자란 억새들은 머리끝만 간신히 드러내고 있으며 버들가지는 흐르는 물 따라 누워 있고 그 가지 위에 백로 한 마리 두리번거린다. 강물 건너편에 어린 새끼들이 오밀조밀 모여 놀고 있는 것이 아마 그놈들 먹거리를 찾아 나선 모양이다.
강 주변은 매우 현란하다. 그간 사람들이 벌여놓은 강에 대한 행태들이 적나라하게 설치되어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온갖 버림받은 쓰레기들이 제멋대로 걸쳐지고 휘날리며 사람들을 향해 온몸으로 절규하며 시위하고 있다. 강줄기와 용골산을 오가는 안개도 심난한지 불안정한 듯 빠르게 움직이다가는 싸리재쪽으로 흘러 가버리고 새들도 부산하게 움직인다.
산방의 앞마당에 심어놓은 고추나무, 그동안 물주고 벌레 잡아주면서 키웠더니 주렁주렁 맺힌 열매가 이제는 빨갛게 익었다. 소쿠리를 끼고 따고 있는데 서울에서 손님들이 왔다. 작년에 섬진강 기행 중에 이곳 산방에 들렀었는데 다시 찾아 온 것이다. 빨간 고추가 예쁘다며 달려들어 같이 거든다. 그 옆에 자기네 키만큼이나 자란 토란잎 위에 물을 부으며 하얗게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면서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강에 가보고 싶단다. 작년에 가봤던 강에 대한 추억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간직하고 싶어서 자주 떠올리곤 했단다. 어지러운 강변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서 들렀다가 곧장 강천산 쪽으로 가는데, 오늘이 순창장날 이라고 했더니 누군가 순대국을 먹고 싶다고 한다. 알고나 이야기하듯. 으레 시골 장에 가면 국수, 팥죽, 순대국, 막걸리 등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실제로 순창 장터에 가면 맛있는 순대국집이 있다. 가는 길목에 있는 방앗간에서는 햇고추 말린 것을 빻느라 분주하다. ‘삼대째연다라순대집’이라고 전통을 내 세우며 유리창에 써 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땡볕더위에 국밥 끓이는 훈증까지 더한데다가 냉방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집이다.
우리는 뚝배기에 가득 담아준 국물까지도 땀을 줄줄 흘리면서 맛있다고 감탄하며 열심히 먹어 치웠다. 한 그릇에 4천 원씩 주고 비교적 싼값에 한 끼 대접을 푸짐하게 한 셈이다. 장터구경을 하려고 했었는데 워낙 햇볕이 따가워서 포기하기로 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장터는 한산하니 파장에 가까운 분위기이다. 원래 이른 아침에 성시를 이루기도 하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는 여름철 농한기임에도 불구하고 더욱이나 그렇다.
풍만한 배를 안고 강천산으로 갔다. 강천산 가는 길은 다닐 때마다 짙은 느낌을 갖는다. 우거진 나무숲길과 계곡의 물은 푸르름과 시원함을 더해주고 가을엔 형형색색의 단풍잎이 뒹굴다가는 맑은 계곡물에 잠겨 어른거리며 가슴 설레게 하던 느낌... . 오늘도 은근히 기대하며 입구까지 가보니 주차장에 빼곡히 진열된 차들과 매표소 앞에 늘어진 차량을 보고서는 ‘주말에 온 것이 잘못이지’라고 두런거리면서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회문산으로 갔다. 훨씬 한산하다. 조금 오르다가 계곡으로 내려가려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래도 내려가서 바위에 걸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움을 느끼고 땀도 식고해서 편안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계속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는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겹다.
한두 곳에서가 아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음식이 물론 맛이야 있기는 하겠지만, 뜨거운 불판에서 뿜어내는 열기와 튕기는 기름과 연기를 뒤집어쓰게 될 자연은 얼마나 괴로워할까. 자연이나 사람이나 동병상련이겠지.
자리를 떠나 ‘빨치산 사령부’를 재현해 놓은 산중턱 쪽으로 올라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초소에서 인민군 복장을 한 군인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당시의 벙커에서 생활하는 모습들, 이를테면 부상자가 치료를 받는 장면이라든가 총기를 수리하는 등의 모형들을 만들어 놓은 곳을 살펴보았다. 광복60주년의 기쁨과 분단 60주년의 아픔을 함께 느껴야 할 수밖에 없는 오늘, 8월의 이곳은 씁쓸하기만 하다.
산중턱의 조그만 계곡 양쪽에 걸쳐 앉아 졸졸대는 물소리에 더위를 식히며 지난 이야기들을 해대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콧속까지 개운하게 불어주는 맑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자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떠올려보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밤길을 걷는데 등을 들고 가더란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서는 “여보시오 당신은 보지도 못하면서 웬 등이요?” 하고 물었다. 대답하길 “내가 등불을 비추면 다른 사람이 훤한 길을 갈 수 있지 않겠소.” /www.soom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