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에 기대어 지리산을 바라보며
덕유산에 기대어 지리산을 바라보며
  • 장갑수
  • 승인 2005.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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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의 아름다운산행]월봉산·거망산·황석산(1279m·1184m·1190m, 경상남도 함양·거창)
대진고속도로 서상나들목을 빠져나오자 남덕유산이 우뚝하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는 남덕유산과 서봉을 실제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갖다놓았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영각사가 고요를 즐기고 있다. 바람소리 새소리와 함께 하고, 나무와 하늘을 벗 삼아 살아가는 비구니 스님들의 생활은 그 자체가 수행이다. 나목 상태의 산과 화려하지 않는 절이 어울린 모습이 소박하다.

남령에서 남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미련 없이 자신을 버린 나뭇잎들은 사람이 밟으면 밟히고 바람이 불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날리기도 한다. 나목으로 변한 나무들은 이미 올겨울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갔다. 그래서 나무들은 새싹이 나는 봄까지 묵언수행을 한다. 묵언수행을 하는 나무들은 매서운 눈보라도 감내해야하고,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도 견뎌내야 한다.

수리덤을 지나 능선길을 무심히 걷고 있는데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은 바위 봉우리 하나가 예고 없이 나타난다. 칼날봉이다. 50m 이상의 높이로 날렵하게 솟아오른 바위는 주변의 나무들을 호령하고 있다. 설악산의 범봉을 보는 것 같다. 거대한 바위 아래를 돌아 올라가니 덕유산군(群)을 이루는 산줄기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온다. 남덕유산에서 정상인 향적봉까지의 흐름이 웅장하고, 월봉산·금원산·기백산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솟아 있다.

월봉산 암릉과 거망산 억새

▲ 월봉산 북능과 덕유능선 ⓒ장갑수 아기자기한 암릉길이 계속되면서 로프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 아래를 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설악산 축소판 같은 바위들은 병풍처럼 펼쳐진 덕유산 앞에서 재롱을 피운다. 암릉을 이루던 산은 어느새 육산으로 바뀌어 잠시 억새밭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월봉산에 올라서자 지리산 주능선의 파도치는 모습까지도 조망이 된다. 거망산을 거쳐 황석산으로 뾰쪽하게 솟아오른 산줄기가 의젓하게 손짓을 한다. 분지를 이룬 서상면 들판이 정답게 다가온다. 나목들 속에서 푸름을 유지하고 있는 산죽의 모습은 싱그럽다. 큰목재를 지나 수망령·금원산·기백산으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산세를 살핀다. 여기에 갈라진 산줄기는 금원산을 일으키고 나서 기백산으로 뻗어간다. 또 한줄기는 거망산을 거쳐 황석산을 솟구친다. 두 능선 사이에 형성된 용추계곡이 깊고도 깊다. 저 깊은 골짜기에서는 6·25 때 빨치산 활동이 심했다.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에게 국군 1개 소대가 무장해제 당하고 목숨만 부지한 채 하산했다는 당시의 얘기도 전해져 온다. 은신치에서 봉우리 하나를 올라서자 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솜털 같은 꽃이 떨어진 억새의 흔들림이 쓸쓸하다. 거망산으로 가는 길에는 억새밭과 숲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역광에 반짝이는 억새 너머로 거망산과 황석산이 우뚝하다. ▲ 황석산 암봉 ⓒ장갑수
작은 바위봉우리 하나를 넘어 도착한 곳은 거망산이다. 거망산 남쪽으로 억새밭이 부드럽고, 황석산을 이루고 있는 능선은 사뭇 가파르다. 월봉산과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시원하게 조망이 터진다.

억새밭을 지나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황석산을 향하여 걷고 또 걷는다. 황석산 뒤로 반야봉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능선이 믿음직하다. 종종 나타나는 억새밭 너머로 바라보이는 황석산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억새의 질감이 제대로 느껴지는 10월 초·중순이었으면 억새와 어울린 황석산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황석산 북봉 앞에 서자 날카롭게 솟은 암릉이 인상적이다. 우회로가 있지만 나는 가파른 암릉을 타고 북봉을 오르기 시작한다. 날렵한 능선은 양쪽으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 벼랑을 이루어 내려보기만 하여도 아찔하다.

칼날 같은 암릉에는 역사의 아픔이

황석산 정수리로 통하는 칼날을 세워놓은 듯한 능선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잊는다. 칼날처럼 날렵한 능선은 수없이 많은 바위들의 조합이다. 이런 칼날능선을 받쳐주는 것은 아래의 포근한 숲이고, 뒤편으로 보이는 여러 산줄기들이다. 암릉 아래로는 복원된 황석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우회로를 통해서 가는데, 나는 다시 북봉에 이어 정상으로 통하는 봉우리도 암벽을 타고 오른다.

월봉산이나 거망산도 조망처로서 손색이 없지만 황석산은 두 산을 훨씬 뛰어넘는다. 황석산 암릉과 거망산-월봉산으로 이어가는 능선과 남덕유산에서 향적봉까지의 덕유능선, 그리고 금원산-기백산이 만든 거대한 산군(山群)이 거창과 함양의 모태가 된다. 가야산과 수도산, 의상봉과 오도산·황매산·둔철산 등 거창과 함양·산청의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온다. 함양 백운산·괘관산은 물론 멀리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까지 가세하니 여기는 이미산 공화국이다. 유일하게 보이는 평지, 함양의 안의면 소재지와 주변 들판도 산에 기대어 생명력을 유지한다.

   
▲ 황석산성과 남쪽암릉 ⓒ장갑수
황석산성과 북문이 복원된 채 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옛 성을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고쳐 쌓은 황석산성은 황석산 정상을 중심으로 2.5km를 둘러싸고 있다. 황석산성은 선조 30년(1597)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음 현감 곽준이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이 때 정상 동쪽 바위 절벽이 피로 물들었다 하여 지금도 피바위라 부른다.

북문과 황석산성 남쪽으로도 아기자기한 암릉이 이어진다. 북문에서 동쪽능선을 따라 하산을 하면서 황석산을 바라본다. 동쪽비탈의 바위가 수백 미터의 매끄러운 벼랑을 이루고, 능선의 바위들은 촛불이 타오르는 듯하여 북쪽에서 본 모습과 사뭇 다르다.

나목 사이에 아직까지 잎을 달고 있는 단풍이 가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산골 깊숙이 자리 잡은 연촌마을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빨간 감과 잘 깎아서 매달아놓은 곶감이 늦가을의 정취를 가져다준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하늘에 휘영청 떠 있는 반달이 달빛을 비춰준다.
 
*산행코스
-.제1코스 : 남령(2시간) → 월봉산(40분) → 수망령 갈림길(40분) → 은신치(1시간 20분) → 거망산(2시간) → 황석산(1시간 40분) → 유동마을 (총소요시간 : 8시간 20분)
-.제2코스 : 황석산청소년수련원 또는 유동마을(2시간 10분) → 황석산(1시간 50분) → 거망산(1시간 20분) → 은신치(40분) → 용추자연휴양림(30분) → 용추사 주차장 (총소요시간 : 6시간 30분)

*가는 길
-.대진고속도로 서상나들목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육십령 쪽으로 좌회전하여 달리다 보면 영각사 이정표가 나온다. 영각사 앞을 지나 거창군 북상면 방향으로 가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여기가 곧 남령이다. 대형버스도 진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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