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서 산이 되고 꽃이 되고
산속에서 산이 되고 꽃이 되고
  • 장갑수
  • 승인 2006.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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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의아름다운산행]지리산 상내봉·새봉(1200m·1315.4m, 경상남도 함양·산청)
차창 밖에서 다가오는 배롱나무 꽃이 산뜻하다. 배롱나무는 여름이면 남도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무더운 여름을 예쁘게 장식한다. 100일 동안이나 핀다고 하여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오래된 절이나 고택의 마당, 정자나 향교 옆에서 꽃을 피워 한 여름의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산 높고 골 깊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 추성리로 모아지는 능선과 골짜기다. 지리산 계곡 중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칠선계곡이 그렇고, 국골과 허공다리골이 그러하다. 하봉에서 뻗어내린 초암능선과 말봉에서 시작된 두류능선, 상내봉에서 벽송사로 뻗어 내린 벽송능선 등 어느 곳 하나 처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 벽송사. ⓒ장갑수 벽송사로 오르는 숲길이 상쾌한 그늘을 제공해준다. 경사진 벽송사 진입로를 걸으며 부처를 만날 준비를 한다. 절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 두 기가 사천왕상을 대신한다. 툭 튀어나온 눈과 크고 뭉툭한 코, 합죽한 입이 우직한 시골 사람 모습이다. 머리가 절반 정도는 타버린 여장승의 모습이 안타깝다. 산사는 적요하고 스님은 한가롭고 한 여름 뙤약볕에 산사는 적요하고, 종루에서 고요함을 즐기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한가롭다. 산사를 둘러싼 대나무가 청신하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벽송사(碧松寺)는 이름에 걸맞게 커다란 노송이 절의 격조를 높인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지리산만큼 우리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산도 없다. 신라와 백제가 겨루던 삼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왜란이 있을 때마다 지리산은 온몸으로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관군에 쫓긴 동학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농민들의 봉기를 품어주었던 산도 지리산이다. 그 중에서도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이어졌던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와의 싸움으로 지리산은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 은신하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때 주로 이용하였던 지형지물이 산죽, 낙엽, 바위굴 같은 것이어서 산죽비트, 낙엽비트, 바위비트로 불렸다. 벽송사에서 상내봉으로 이어지는 벽송능선에 산죽비트, 낙엽비트, 바위비트를 재현해 놓았다. 이런 비트를 보면서 민족의 아픔을 생각한다. 허공다리골의 물소리가 가깝게 들려와 능선길을 걸으면서도 계곡길을 걷는 느낌이다. 포근한 흙길은 걷기에 편안하다. 나무 사이로 송대동 마을과 골짜기가 내려보인다. 송대동에서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선녀골 독거촌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빨치산 2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바위비트인 선녀굴도 있다. 새봉 가는 길이 나뉘는 상내봉(1200m)에 올라선다. 상내봉 바위에 올라서서 보는 웅석봉에서 왕등재, 외고개를 지나 새봉, 쑥밭재, 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동부능선이 일목요연하다. 그리고 형제봉에서 명선봉을 거쳐 반야봉으로 뻗어가는 지리산 주능선과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으로 이어가는 서북능선이 유장하다. 지리산 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는 엄천강의 물 흐름은 유유하다. 엄천강 너머에서 삼봉산과 백운산·금대산·법화산이 지리산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산청의 둔철산과 황매산도 경호강을 넘어 다가온다. 산속에 들어서면 내가 곧 산이 된다. 지리산에 들면 지리산이 되고, 설악산에 가면 설악산이 된다. 산속의 아름드리나무도 되고, 노래하는 새가 되기도 하고, 수줍게 핀 야생화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인이 되는 순간 세속의 욕망에 찌들인 나는 사라지고 자연과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 나만이 남게 된다. 동쪽 오봉리로 하산하는 길이 갈리는 사립재를 지나 새봉으로 오른다. 지난해 여름, 태극종주를 할 때는 운무가 가득 끼어 전망이 터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시야가 터져 사뭇 장쾌하다. 독바위로 다가오는 풍경들 ▲ 독바위에서 본 대원사 계곡. ⓒ장갑수
수국과 하늘나리, 까치수염 같은 야생화와 함께 행복에 겨워하는 나비는 자유분방하다. 로프를 타고 독불장군처럼 거대하게 솟은 독바위에 오른다. 독바위는 50m 이상의 절벽을 이루어 아찔하기까지 하다. 사방팔방으로 터지는 조망은 그동안 흘린 땀을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깊고 깊은 대원사계곡이 산 높이니 골 깊다는 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대원사계곡 상류에 형성된 조개골은 속세와는 인연이 먼 별천지 같다. 왕등능선을 거쳐 웅석봉으로 솟아오른 산줄기의 변화무쌍한 기상에 넋을 잃기도 한다. 비둘기봉 뒤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써리봉의 모습은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두류능선과 벽송능선 사이에서 허공다리골이 산자락을 휘감는다. 하봉과 중봉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온갖 고통을 딛고 아름답게 승화되었다.


 
 
▲ 왼쪽부터 말나리, 비비추, 산수국, 원추리, 참휘. ⓒ장갑수
쑥밭재 다음 안부 근처에 도착하자 조개골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물소리가 멀어지고 새소리·매미소리마저 그쳐버린 산골에서는 가끔 살랑거리는 바람만이 외로움을 달래준다. 이곳은 지리산 중에서도 사람의 통행이 뜸한 오지 중의 오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을 국골사거리를 가늠하며 땀을 흘린다.

국골사거리에서 도착하자 국골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그지없이 시원하다. 국골사거리에서 하봉 가는 길과 국골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두류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곧바로 올라선 바위봉우리는 영랑대라고도 불리는 말봉이다. 구상나무 같은 고산지대 수종들이 운치 있다. 살짝 덮은 운무는 지척에 있는 하봉까지도 가려버렸다. 거센 바람을 이겨내느라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구상나무가 불균형의 균형을 이룬다. 급경사를 이룬 암릉길이 험준하기도 하다.

울퉁불퉁하고 잘생긴 데라곤 하나도 없지만 다른 바위와 어울리고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면 멋진 풍경이 된다. 특히 바위와 어울린 적송의 운치는 고고한 청학(靑鶴)을 연상케 한다. 국골을 사이에 두고 초암능선과 나란히 추성리를 향하여 고도를 낮추어간다. 녹색바다를 이룬 산비탈은 나무공화국이다. 점차 바위가 없어지면서 포근한 흙길을 걷는다. 어느덧 국골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하다.

*산행코스
-제1코스 : 추성리주차장(20분) → 벽송사(1시간) → 송대삼거리(1시간 30분) → 상내봉(40분) → 새봉(20분) → 독바위(1시간 10분) → 국골사거리(2시간 50분) → 광점동(20분) → 추성리주차장 (총소요시간 : 8시간 10분)
-제2코스 : 추성리주차장(20분) → 벽송사(1시간) → 송대삼거리(1시간 30분) → 상내봉(40분) → 새봉(30분) → 쑥밭재(1시간 30분) → 어름터(40분) → (광점동 경유)추성리주차장 (총소요시간 : 6시간 10분)

*가는 길
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인월면 소재지다. 여기에서 60번 도로를 따라 엄천강을 따라가다 보면 마천면소재지를 지나 칠선계곡 입구 다리를 만난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가면 추성리와 벽송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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