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에서 다가오는 배롱나무 꽃이 산뜻하다. 배롱나무는 여름이면 남도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무더운 여름을 예쁘게 장식한다. 100일 동안이나 핀다고 하여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오래된 절이나 고택의 마당, 정자나 향교 옆에서 꽃을 피워 한 여름의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산 높고 골 깊은 지리산에서도 가장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 추성리로 모아지는 능선과 골짜기다. 지리산
계곡 중 가장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칠선계곡이 그렇고, 국골과 허공다리골이 그러하다. 하봉에서 뻗어내린 초암능선과 말봉에서 시작된 두류능선,
상내봉에서 벽송사로 뻗어 내린 벽송능선 등 어느 곳 하나 처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수국과 하늘나리,
까치수염 같은 야생화와 함께 행복에 겨워하는 나비는 자유분방하다. 로프를 타고 독불장군처럼 거대하게 솟은 독바위에 오른다. 독바위는 50m
이상의 절벽을 이루어 아찔하기까지 하다. 사방팔방으로 터지는 조망은 그동안 흘린 땀을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깊고 깊은 대원사계곡이 산
높이니 골 깊다는 원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대원사계곡 상류에 형성된 조개골은 속세와는 인연이 먼 별천지 같다. 왕등능선을 거쳐 웅석봉으로
솟아오른 산줄기의 변화무쌍한 기상에 넋을 잃기도 한다. 비둘기봉 뒤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써리봉의 모습은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두류능선과 벽송능선 사이에서 허공다리골이 산자락을 휘감는다. 하봉과 중봉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온갖 고통을
딛고 아름답게 승화되었다.
▲ 왼쪽부터 말나리, 비비추,
산수국, 원추리, 참휘. ⓒ장갑수
쑥밭재 다음 안부 근처에 도착하자 조개골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물소리가 멀어지고 새소리·매미소리마저 그쳐버린 산골에서는 가끔 살랑거리는 바람만이 외로움을 달래준다. 이곳은 지리산 중에서도 사람의 통행이 뜸한 오지 중의 오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을 국골사거리를 가늠하며 땀을 흘린다.
국골사거리에서 도착하자 국골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그지없이 시원하다. 국골사거리에서 하봉 가는 길과 국골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두류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곧바로 올라선 바위봉우리는 영랑대라고도 불리는 말봉이다. 구상나무 같은 고산지대 수종들이 운치 있다. 살짝 덮은 운무는 지척에 있는 하봉까지도 가려버렸다. 거센 바람을 이겨내느라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구상나무가 불균형의 균형을 이룬다. 급경사를 이룬 암릉길이 험준하기도 하다.
울퉁불퉁하고 잘생긴 데라곤 하나도 없지만 다른 바위와 어울리고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면 멋진 풍경이 된다. 특히 바위와 어울린 적송의 운치는 고고한 청학(靑鶴)을 연상케 한다. 국골을 사이에 두고 초암능선과 나란히 추성리를 향하여 고도를 낮추어간다. 녹색바다를 이룬 산비탈은 나무공화국이다. 점차 바위가 없어지면서 포근한 흙길을 걷는다. 어느덧 국골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