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1박 산행
벌써 그곳에 다녀 온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곳이 늑골 깊숙이 저장되어 있다. 다름 아닌 이원규 시인이 ‘행여 견딜 만하면 제발 오시지 마라’라고 너는 늘 변덕스럽지만 그 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으로 있다는 지리산이다.
몇 해 전 견딜만한 도리가 없던 대구의 벗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지리산을 다녀와서 세석아래 선술집에서 보기 싫어 질 때까지 한잔씩 하고 헤어지자 했는데 이제야 겨우 실행을 한 것이다.
벗들이 모든 것을 준비할 터이니 전라도 묵은 지만 가져오라 한다. 지리산에 다녀온 기억을 더듬어 보니 주능선을 걸었던 마지막이 1992년, 고인이 되신 은사님과 눈 내린 3월 주능에 단둘이 다녀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도 자주 찾았지만 산자락의 문화재에만 눈길 발길을 주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산행은 다시 처음 산행을 하는 것처럼 꼼꼼히 준비를 했다. 20살 먹은 배낭을 챙기고 옷가지를 챙겨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10년 된 고어텍스 점퍼뿐이었다.
하여 지금은 부쩍 늘어나 문흥지구에도 생긴 산악장비점에 들렸다. 바지와 덧바지, 아이젠, 모양말, 수통을 사고 있으니 등산복을 일상복으로 입는 한 손님이 우회적인 표현으로 지리산을 대하는 장비부족을 참견한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는 것 자체도 산에 형벌을 가하는데 무겁게 몸치장 배낭치장 하여 지리산을 주저앉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분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친다, 치고 내려온다”라는 말이 주는 거북함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여튼 그렇게 장비를 챙기고 묵은 지와 과일 몇 가지를 챙기고 중산리로 향했다. 세우 같은 비가 내리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만나는 우중산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천왕봉에 가까운 길을 잡고 11시에 출발한 산행은 로터리 산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게 했고 정상에 약간 못 미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어둑한 6시에 천왕봉에 설 수 있었다.
경관이 예쁜 곳에 멈춰서 깊은 겨울과 이른 봄이 공존하는 잿빛의 풍경에 취하고 해찰할 것은 다 참견하면서 다리의 노역을 온 몸의 즐거움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 공원관리공단에서 길 아닌 길로 빠져가려는 이들을 막기 위해 만든 울이 대부분 고사목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끈이 닥나무 껍질이거나 것도 여의치 않으면 칡이나 노끈을 활용한 소소한 마음 씀이 고맙게 다가왔다. 산정에 섰을 때 불어오는 칼바람은 단 10여분도 서 있지 못하게 했지만 한반도의 남쪽 지붕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지난 시절을 상기했다. 92년 은사님은 천왕봉에서 물었다. 정상에 서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나는 이제부터 감히 산정에서 산을 정복했다는 교만한 말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지리산에서 인간은 그 드넓은 가슴의 일부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주능 종주에서 제대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은 어느 공간에서도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옮겨왔다. 돌아가시지만 않으셨다면 여러 산을 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터인데 라는 생각으로 옮겨가자 쓸쓸한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모두들 저마다의 생각들을 추스르고 묵묵히 이마에 전등을 켜고 장터목 산장으로 향했다. 누군가 부르는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라는 노래가 가슴 깊이 파고드는 가운데 산장에 도착했다. 난방이 되는 장터목산장에서 신열을 앓다 준비한 비상약으로 겨우 진정 시킨 후 이른 새벽 운무의 장엄한 행렬을 목도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느릿하게 중산리로 내려와 거림마을의 한 산장에서 밤을 세워 지난 시절을 얘기하다 고마운 지리산을 향해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이제 또 한참은 지리산에 가지 않아도 될 만한 양분을 지리산은 내게 거저 주었다. 고마운 지리산. 당신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저는 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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