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난 분홍인간
다시 살아난 분홍인간
  • 범현이
  • 승인 2009.02.20 19: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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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와 스포츠로 세상과 맞서는 작가 박수만(46)

넓은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가느다란 눈을 연신 깜박이면서도 창이 넓어 빛을 안으로 들일 수 있어 무엇보다도 감사해 한다.

새로 작업실을 마련해 이사한 것은 넉 달 전이다.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다. 역시 길 가다. 예전 작업실도 길 가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소음이 심해 조용한 곳으로 옮기고 싶었는데도 다시 또와리를 튼 곳은 길 가가 돼 버렸다.

창 문 너머는 사람들 북적이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사거리다. 사람만을 그리는 작가에게 어쩌면 당연한 위치인 지도 모른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창 문 너머로 내려다보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림 안, 분홍인간들은 소음과 공해, 움직임 많은 부산함 속에서 만들어져 비로소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난다. 무표정한 사람들 얼굴을 바탕으로 분홍인간은 표정을 가진다. 웃기도 하고 일그러지기도 하며 찡그리고 혹은 명상에 젖어 다시 무표정이 된다. 
 

▲ 박수만 작가.

몸통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인 진실이 담겨있어


작가와 그림은 닮았다. 아니, 그림 안 분홍인간은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다. 가느다란 눈매가 닮았고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을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닮았다.

그림 속의 분홍인간들은 어눌한 표정 같지만 오히려 배를 내밀며 당당하다. 늘 안으로만 삭히며 살아가는 작가가 자신의 분신을 통해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작가가 표현하는 것은 그림을 통한 내면의 ‘자아(自我)’다.

지금까지의 작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었다. 나 좀 봐라! 하는 표정으로 서로 몸통과 다리가 붙어 원을 그리고 있는 <뫼비우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발과 머리, 몸통이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붙어 상생을 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면 ‘영원히 혼자일 수는 없다’는 명제다.

지극히 단순화 되어 원형의 물성만이 살아남아 파스텔 톤으로 표현되는 분홍인간에 하나씩 붙어있는 욕망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욕심을 말한다.

균형에 안 맞는 큰 머리에 이지러지거나 표정 없어 보이는 분홍인간들의 목소리에도 삶의 고단함, 체념, 회한이 가득 담겨 있어 그림을 읽어가다 보면 작가의 평온하지 않았을 삶도 눈에 보여 숙연함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 박수만 作 「2008 나 너 우리2」

몸은 세계를 소통하는 통로이자 전부


▲ 박수만 作 「2008 나 너 우리」
분홍인간은 작가 자신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려 처음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분홍인간은 손 없는 팔을 온 가득 벌려 그에게 다가왔고 분홍인간의 품에 안겨 자궁 속을 헤엄치며 세밀하고 농밀한 모습의 형상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분홍인간은 하나같이 벌거벗었다. 그림 안에서 분홍인간은 주변의 욕망을 읽기 전에는 신분을 알 수 없다. 신분을 말해주는 그 어떤 것도 걸치지 않은, 벗은 혹은 벗겨진 익명의 몸통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누구나 자신을 덮여볼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요즘 그가 그리는 그림은 주로 스포츠에 관계된 그림이다. 벌거벗은 분홍인간들이 세상을 향해 드디어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을 내밀기 위해 분홍인간들은 진화도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거침없이 팔이 생겨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팔 없이 지낸 분홍인간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다리의 길이만큼 더 늘어났다.

아마 작가가 이 시대에 하고 싶은 주먹일 지도 모른다. 글러브가 심상치 않다. 그냥 그려져 있는 것 같은데 글러브에는 힘이 무게감 있게 실려져 있다.

글러브의 중량감은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한 방향을 향해 몸통이 날아가게도 하지만 어쩐지 통쾌하다. 때리는 분홍인간도 맞는 분홍인간도 우울한 낯빛이지만 잘못된 것일까. 오히려 작가의 건강한 사고가 엿보여 희망이 보인다.

조그맣게 보이는 한 마리의 개도 한 마디 톡톡히 해낸다. 물릴래? 말래? 경고도 보낸다.  뭉툭한 입을 가지고 늑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향해 분홍인간과 같이 한 방 날린다.

“권투, 축구 등의 스포츠를 통해 분홍인간을 표현하며 세상과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싶다. 사회에서 바라볼 때는 단지 스포츠이지만 그림 안에서는 어쩐지 넋두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고 작가는 웃으며 말한다.

▲ 박수만 作 「2008 세상 바라보기」

다시 세상을 향해 배를 내밀며


2008년에는 이 지역 작가로는 드물게 전국 순회 전시도 했다. 작가는 이 지역 대표화랑인 나인갤러리의 전속 작가다. 한국국제아트페어, 화랑미술제, 아트 싱가포르, 질투는 나의 힘 등 20여 개가 넘는 전시회도 가졌다. 그만큼 성실하고 내밀한 작가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새로운 신작인 <너, 나, 우리> 시리즈에서 스포츠에 관계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어쩐지 서로 싸우면서도 은근히 웃고 있는 듯한 표정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개인 마음속에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쉽고 내밀하게 보여준다.

내 마음 속 진실을 찾아 몸통들과 숨은 그림을 찾아 모자이크를 해가고 하나씩 퍼즐을 맞춰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삶의 정점에 다다른다. 작가가 그리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분홍인간의 온 몸 위로 연관 있든 없든 둥둥  떠다니며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숨길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진실들이다.

작가는 다시 새로운 해를 맞았다. 이사도 했고 이미 여러 곳에 전시회도 잡혀져 있다. 한 발씩 어눌하게 떼던 발걸음이 이제는 더 가속을 할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은 작가를 향해 열려있다.

▲ 박수만 作 「2008 행운」

프롤로그


작년 여름, 중국의 후난 성 박물관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마왕퇴한 묘 진열관과 그의 가족들이 발굴된 유물들 속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셔터를 눌러대는 미라도 아니었고 입고 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려한 옷도 아니었다.

이미 유리 진공관 안에 들어가, 일반 관객들에게 별로 관심거리도 안 되는 인형들이었다. 아마도 가족들 전부를 묘 안에 차례차례 안치하면서 부장품으로 넣었을 50cm정도 크기의 인형들이었다.

그림이나 조각품들 중 2000년이란 시간의 흐름으로 눈과 코 등도 희미하지만 머리와 몸통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팔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대 그곳의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마음과 진실은 아마도 머리와 몸통 안에만 존재하다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전혀 어색하지 않는 몸통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을 그리는 작가를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후의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인가. 자신이 그동안 살아 온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일시 : 2월25일(수)~3월24일(화)
장소 : 광산구 신촌동 갤러리-줌
문의 : 010-5542-6464

▲ 박수만 作 「2008 나 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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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팔 2009-03-03 23:45:49
작품올리라기에 들어왔다가 방법을 몰라 리플만 남기고 갑니다. 기사쓰기에 그냥 써야되는건지...쩝.
우리내 삶의 적나라함이 옷가지 하나 걸치지 못하고 까발려져 있네요...순전히 저의 느낌.

민들레 2009-02-24 22:08:48
분홍인간.. 읽으면서 나는 무슨 색을 띤 인간일까를 생각해봅니다. 각자 자신만의 향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겠지요. 좋은 작가를 소개해주는 <작가탐방>. 전혀 문외한이던 내게 그림을 보는 눈을 길러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