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념 하듯 걸어보는 봄길 여행
묵념 하듯 걸어보는 봄길 여행
  • 전고필
  • 승인 2009.03.0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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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길을 깨우는 봄꽃들

언제부터인가 길을 보는 나의 눈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기능의 길(路)과 깨달음의 길(道)로. 하지만 신발을 땅에 대고 길에 서면 역시 나눈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길섶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시야에 들어오거나 말을 걸어오거나 귓전을 스치거나 향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길 위의 풍경들이 나의 오감을 통째로 점령해 버리는 그런 행복한 날들. 그중 가장 행복한 날들이 왔다. 봄이다.
  
봄은 눈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향기와 발끝에 닿는 감촉으로 온다. 살포시 밟히는 흙의 살가운 기운은 그대로 온몸을 관통하여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그것도 벅찬데 코끝을 파고드는 꽃향기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 (왼쪽부터) 개불알풀, 냉이꽃.

며칠간 제주도로 해남 산이면으로 무등산으로 신안의 선도와 안좌도로 싸돌아 다녔다. 물론 일 때문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길 위에 서면 말을 걸어오는 뭇 생명들 때문에 일은 뒷전으로 멀어져 간다.
  
틈만 나면 해찰을 한다. “워메 여기는 냉이꽃 개불알풀이 피었네 코딱지만한 것들이 용케도 겨울을 이기고…앗 그 옆에는 광대나물이 곧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네 장한 것들.” 그렇게 말을 걸어보고 몸을 낮춰 그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봄을 보려면 그렇게 키를 낮춰보는 방법이 제격인 것 아닌가 싶어질 때 고개를 드니 동백이 선연한 꽃망울을 등불처럼 환하게 켜고 있다. 이곳저곳 빛나는 동백의 꽃망울은 밤바다를 지켜주는 등대의 등롱처럼 영롱하다.
  
▲ (왼쪽부터)바람꽃, 동백꽃.

그러고 보니 내 코를 간질이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하면서 실체를 확인해 봐야지 하고 사위를 두리번거려 본다. 그러면 그렇지 매화다. 매화가 홍조를 띄고 피어났다. 좀 이르다 싶은 것들 곁에는 바짝 약오른 아이들의 눈망울처럼 한줌의 따스한 햇살만 비추어도 펑하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려 보니 머위도 땅에 바짝 엎드려서 꽃을 올리고 있다. 바람만 좀 잦아지면 꽃과 함께 꽃대를 불쑥 쏘아 올릴 기세다.

지금 계곡 양지와 음지사이의 습한 곳에 이르면 복수초가 피어 있을 것이다. 낙엽들 사이에서 노랗게 피어 있을 복수초, 그 꽃이 활짝 필 무렵이면 노루귀도 피어난다. 꽃을 먼저 올리고 그 꽃 진 다음에 잎이 돋아나는 노루귀, 노루귀가 만개할 무렵이면 괭이밥도 피고 진달래도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서 꽃부터 쏘아 올린다. 
  
아, 그대를 잊어 버렸구나. 변산바람꽃, 복수초보다 먼저 피었을 바람꽃은 변산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변산바람꽃이 되었는데 이 꽃은 변산의 모항 가는 길 운호리 저수지 안쪽 계곡에 잔뜩 피었을 것이다.
  
▲ 산수유

습자지처럼 연약한 꽃잎이 눈을 뚫고 피어 올리는 그 장엄함 앞에 절로 고개를 숙여야 했던 모습. 벌써 다섯 해 전 이었던가. 이맘때 변산의 형들이 전화를 했다. “어이 와야제, 꽃이 폈어. 꽃도 보고 술도 한 잔해야제.” 그렇게 만났던 변산바람꽃인데 이제 형들의 전화가 없다. 서로의 삶이 얼마나 궁핍해졌는지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다.
  
봄의 길은 모두가 새로운 여행지이다. 집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계절이다. 저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것들이 겨울을 이겨왔고 우리에게 가장 먼저 몸짓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아름다운 모습과 친해지려거든 봄에는 고개를 하늘로 올리지 말고 묵념을 하듯 발 아래만 보고가자. 그리고 시 한편 읽어보자. 나해철 시인의 ‘죽란시사첩 머리말’이다. 자연 세계에서는 사람이 보고 싶어 겨울을 밀어낸 봄꽃이 있다면, 그 꽃들이 아름다워 친구를 호명하는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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