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에게 몰아준 아카데미 대박쇼
아카데미상을, 70시절엔 무조건 신봉했는데, 80시절엔 답답해 보였고, 90시절엔 미국 우월주의의 전도사로 보였고, 00시절엔 심드렁해졌으나 아예 무시하진 않았다. 올해 아카데미상에도 별 호기심 없이 무심하였다.
<벤자민 버튼>이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기에, “아카데미상이 뻔-하지 뭐~!” 그런데 정작 아카데미상을 무려 8개나 휩쓴 영화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란다. 인도 빈민촌을 배경으로 인도음악이 잘 버무려져 있다고 한다. 보수적 영화제가 빈민촌 영화를? 할리우드가 발리우드를? 뭐야? 호기심이 일었다.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47448&videoId=20787
인도 빈민촌이 얼마나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사는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주인공이 그 밑바닥에서 갖은 고생 끝에 큰돈도 벌고 자기 연인도 찾는다는 ‘뻔-한 신데렐라 해피엔딩’이다. ‘대박 퀴즈쇼’를 소재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사이사이에 산뜻하게 깔아주는 ‘퓨전 인도음악’이 귀에 쟁쟁하다.
영상색감과 카메라 앵글이 상당히 좋다. 그러나 나머진 별로이다. 퀴즈쇼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게 특이하긴 하지만 너무나 작위적인 우연으로 이어간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도 그랬듯이, 무조건 이상하게만 만드는 게 독특한 아이디어라면 당장 100개라도 만들겠다.
음악상 촬영상 편집상 말고는 줄만한 게 없는데, 아카데미가 왜 이리도 심하게 오버했지? 가히 아카데미 대박쇼이다. 미국 보수 세력이 경제적 공황을 일으키더니 이젠 스스로 정신적 공황까지 일으키나? 다른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는데, 내가 잘못 보았나? 대중재미 B+·영화기술 B+·삶의 숙성 C+.
<그랜 토리노>로 펼쳐 보이는 장렬한 씻김굿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은 무겁고 진지하다. 미국의 어두운 곳을 들추어서 비판하는 것 같지만 ‘좋은 미국’을 위한 애정 어린 쓴 소리이기에, 그는 진정으로 미국을 사랑한다. 공화당 꼴통에게는 떨떠름하겠지만, 양심적인 미국인에게는 참 고마운 영화감독이다. 그래선지 아카데미 영화제도 그의 작품에 호감을 자주 보여준다.
아카데미 영화제가 보수적이지만, 꼴통보수는 아니라는 증거이다. 부시정권의 네오콘이 설치는 미국에 많은 혐오감을 가졌지만, ‘좋은 미국’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에, 나도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랜 토리노>도 딱 그런 영화이다. ‘그랜 토리노’는 1972년에 만든 포드 자동차 이름이다. 60시절에 세계의 모든 걸 주름 잡다가 70시절에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미국에게, 1972년은 세계의 최정상에서 내리막길로 꺾여 들던 시기이다.
이 자동차는 미국이 ‘왕년에 날렸던 그 한 시절’을 상징한다. 그 반대쪽엔 1952년 한국전쟁에서 주인공의 ‘어두운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항복한 17살 소년병을 쏘아죽이고 무공훈장까지 받게 된 것에 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린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도 거부한다.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48483&videoId=20768
아시아인을 원숭이 취급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이 백인 영감탱이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도운 죄로 미국으로 도망쳐온 몽족의 착한 이웃들과 주먹질하고 총질하는 아시아 갱단들 사이에서, 처음엔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면서 일상생활이 느릿느릿 지루하게 펼쳐지지만, 점점 사건이 꼬여들면서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착한 몽족의 아들과 딸에게서 억울하게 죽은 소년병을 향한 죄책감이 되살아나고, 나쁜 아시아 갱단들에게서 전쟁터의 살육현장을 향한 증오감이 되살아난다.
그는 마침내 그 죄책감과 증오감을 해원상생(解寃相生)하려는 한 판의 ‘장렬한 씻김굿’을 펼쳐 보인다.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반전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면서도 기발하게 실감나는 반전이다. 어떤 사람은 이걸 싱겁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게 ‘진짜 시리고 매서운 장면’이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자질구레한 것만 용서를 빌고, 소년병을 쏘아죽인 일은 용서를 빌지 않는다.
인간 세상을 이토록 찌질하게 만들어 놓고도 잘난 체하며 떵떵거리는 ‘뻔뻔한 하느님’을,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밀양>보다도 더 철저하게 절망한다. 놀랍다. 대중재미 B0·영화기술 A+·삶의 숙성 A+.
대사가 평범하고 짧지만, 뜻이 사뭇 깊다. “(부인 장례식 뒤에, 주인공에게 성당을 다니라고 권유하는 신부에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나이 먹은 여자들에게, 영생이나 약속하고 다니는 사이비교주하고 뭐가 달라! // (동네 양아치들에게 M1총을 겨누며) 내 마당에서 꺼져! // (이웃 몽족 딸애가)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에요. / (획 돌아서며) 난 영웅이 아냐! // 꼭 피를 봐야만 터프가이가 아니야! // (이웃 몽족 아들이 갱단에게 박살내자며) 사람 죽이는 거 어떤 느낌이에요? / (무뚝뚝하게) 모르는 게 나아! // (몽족 아들에게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아주면서) 이건 네가 달아야 해! // 난 이미 더렵혀졌어, 그래서 나 혼자 가야해!” 더 많은데, 아른거리며 꽉 잡혀들지 않네요.
[늑대와 함께 춤을] [시티 오브 조이] [미션]처럼, 겉으론 백인우월주의를 반성하는 것 같지만, 속으론 결국 백인우월주의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정도의 반성이라면 그 진정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카데미가 이 진정성을 소화하기에 너무 힘들었을까? 아카데미는 이 영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님의 반성을 정말 존경합니다.
뱀발 : 문득 ‘이 땅의 최고 악마, 경상도 집단이기주의’를 반성하는 경상도 지식인을 한 명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갈증이 확 밀려온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무현과 유시민 그리고 민노당에게는 완전히 실망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고종석이나 진중권은 서울출신이라 말하지 않나? 아쉬운 대로 그들이라도 말해주면 좋겠는데······.
천하의 김용옥도 은근 슬쩍 피해버린다. (그가 충청도 출신이라지만, 외가가 전라도라 그도 강준만처럼 전라도 쪽으로 치부될 법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경상도 사람, 이창동 감독도 박재동 화가도, 경상도의 집단이기주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말하지 않고 저 멀리 산마루만 바라보며 한숨만 쉬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을 인간적으론 십분 이해하지만, 경상도의 집단이기주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말하지 않으면 결국엔 위선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