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남면 지곡리
여기 저기 봄꽃들이 아우성이다. 이 순간 놓치면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가득한 꽃소식도 있지만, 그 꽃들 만나기 전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2주 전 일요일 새벽 접했던 충격 탓이다. 전날 나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던 남해대교 밑에서 잠을 청하고 새벽같이 광양 다압의 매화밭에 도착했다. 하동 쪽에서 접근하는 길은 빠르지 않았다.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내 앞에서 매화밭을 향한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동차로 가득 찬 매화밭을 둘러보는데 두서너 시간, 구례 방향에서 오는 차들은 아홉시가 되도록 밀리지 않았다. 그리나 하동방향에서 오는 차들은 진즉부터 거북이걸음 그 자체였다.
경상도가 넉넉해서였을까.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게을러서 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모두 아니었다. 나만의 독단인지 모르지만 여행을 즐기는 기술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생각했다. 생을 걸어서 책 한권 써 보자. 격주 간격으로 어디로 가라고 부추기는 글이 아닌 어딜 가더라도 그곳에 푹 젖어들며 소중한 느낌을 받고 돌아오는 그런 여행의 기법을 책으로 담아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진창에 발을 담궈 보자, 뭐 그런 고민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보았다. 12년 전 담양 소쇄원. 백발성성한 어르신 한분이 광풍각 중앙에 앉아 서울 말씨로 소쇄원을 설명한다. 주변에는 40여명의 답사객들이 숨을 죽이며 경청하고 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두들 일어선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듯한 그분의 표정과 아쉬운 답사객의 표정 사이 담양이 고향인 나는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는 것 하나 없는 고향사람과 타관사람이 소쇄원 종가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 소쇄원 종가에 들렸다. 공부할 테니 유하게 해 주시라 간청했고 주인장은 허락해 주었다. 마음속으로 1년을 작정하고 밥벌이와 소쇄원의 기숙생활을 병행했다.
태반의 시간은 소쇄원에 죽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차츰 소쇄원을 아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역사에 해박한 사람, 동네 내력을 꿰뚫고 있는 사람, 소쇄원의 문서를 탐독한 사람, 소쇄원을 소리의 정원이라고 말하며 눈을 감아 버린 사람, 소쇄원의 소리와 빛과 시간을 앵글에 담는 사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심은 뜻이 있다는 사람 등등 천차만별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해독방식을 들고 소쇄원에 출입하고 있었다. 두 눈 만으로 소쇄원을 쳐다보고 말하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라는 사실이 비감하게 다가왔다.
시시각각 얼굴을 달리하는 소쇄원에서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모습으로 마치 전부인양 말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부족한 나를 다스리던 6개월여… 일순간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의사는 곧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했고, 지인들은 소쇄원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며칠 후 의사는 오진이라 했고, 그래도 아픈 몸은 소쇄원의 밖으로 나를 보냈다. 소쇄원 밖에 나오니 서서히 몸은 회복 되어갔다. 그리고 전통적인 공간에만 들면 소쇄원과 비교가 되었고, 의문이 터져 나왔다.
관광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그 분야에서 10여년 일을 했지만 소쇄원에서의 6개월이 나에게 가장 큰 공부가 되었다.
세상의 언저리 곳곳에 배울 곳 투성인데 늘 뜬구름만 찾았거나 먹물에만 몰두했던 나는 삶의 방식을 거기에서 바꿨다. 조선중기의 사내, 스승을 잃어버리고, 왕조를 버리고, 처사를 택했던 사내, 그래서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알고 우주를 꿰뚫는 안목을 가졌던 사내 양산보가 내 여행의 스승으로 다가온 것이다.
오늘도 담양 소쇄원에는 눈으로만 말을 거는 태반과 감각의 총체를 날 세우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을 터이다.
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시각에 길들여진 나를 단도리 해 보자. 나머지 퇴화된 감각을 이번에 호명하여 함께 떠나보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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