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현재의 삶 이전의 전생이 정말 있을까. 작가를 보는 순간 내내 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작업이 있는 2층을 들어서기 전 만나는 1층 거실에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온갖 다기들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들었던 생각이다.
전화기 너머 손사래 치는 것이 보일 정도로 완강히 취재 거부를 한 분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보일 수 있는 변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작가의 작품을 본 곳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진작가의 작업실에서였다. 벌써 해를 넘기긴 했지만 작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찾아간 작업실에서의 첫 대면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혹, 작가의 전생은 투박한 우리의 질그릇 등을 만들어내던 솜씨 뛰어난 도공은 아니었을까.
눈꽃 세상도 다도를 향하여
작가의 다기에는 특징이 있다. 다도만을 위한 다기를 만들어 내는 것부터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게다가 찻물을 가득 채우면 다기 안에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나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단지 한 잔의 차가 아닌 한 송이 꽃까지 즐기는 풍경을 연출한다.
작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비로소 발견해낸 나만의 기법이다. 온도와 유약의 특징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형상의 무늬가 나올 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2002년 그동안 일해 왔던 공직을 퇴직하며 그가 선택한 것이 도자기였다. 먼저 생활자기를 배우고 있는 부인(김정덕)과 의견 조율 후 도자기를 배우려 다녔다.
“도자기를 안 만났으면 지금 나의 삶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를 때때로 생각해 보지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지금은 24시간이 온전히 흙과 함께하는 인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예견되어 있던 것들은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결국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만나는 사람들 중, 가끔씩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꿈꾸지 않았던 것들이란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반면에, 너무 흡족해하며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이미 예견된 자신의 일이 아니었을까. 작가를 보는 내내 ‘전생’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였으리라.
찻물 안에 피는 눈꽃 세상
다기 안은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얼음 꽃 같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눈의 결정체 같기도 하다. 아니, 늦여름 무작정 한 무리로 쏟아지는 은하수 같기도 하고, 어린 조막손 같은 나뭇잎들, 은행잎 모양 등이 다양하게 찻물과 어우러진다. 단지 차를 마시는 기능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다기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즐기라는 깊은 의미다.
“수 백 가지의 진귀한 차가 모두 다 여기 있다. 차를 보관하기 우한 차 항아리도 만들었다. 집 사람이 차를 즐기는 다도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겨서 절수가 잘되는 다기를 만들기도 하고, 단지 차만이 아닌 다른 문화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작품으로 표현된 것이다”고 말하지만 어찌 단지 이것뿐이겠는가.
작가의 온 몸을 흐르고 지배하고 있는 DNA가 온통 흙과 불의 조화에 기인한 것임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방금 세수를 한 정갈한 모양의 다기들이 줄줄이 햇빛을 받고 있는 이유다.
늘 입술에 대야 하는 직접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다기이므로 인체에 전혀 해악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작가의 의지다. 천연유약을 사용해 무독성은 기본이고 오히려 은보다 항균성과 항산화성이 뛰어나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을 담아 꽃꽂이를 해두면 열흘이 넘도록 싱싱하다. 유약으로 사용하는 결정유는 이미 학계에 그 기능성이 검증된 천연유약이다”고 귀띔한다.
여행의 하루는 일상의 열흘이다.
작가는 늘 편안하고 행복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용할 다기를 직접 만들어줄 수 있으니 행복하고, 늦은 밤 일터인 학교에서 돌아 온 아내와 하루를 이야기하며 차를 즐길 수 있으니 행복하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 길을 나서면 새로운 풍경에 늘 행복해하고 감사해 하지만 일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행 중 하루의 기쁨은 일상 속에서 열흘 동안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귀천(歸天)>
굳이 천상병님의 ‘귀천’이라는 시를 기억하지 않아도 작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 다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소풍, 혹은 긴 시간을 여행 중이라는 생각으로 살고자 한다. 여행 중의 하루처럼, 하루하루를 일상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행복으로 바로 전환 시키면서 다시 긴 여행을 떠나고 준비하는 중이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아마 지금의 행복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면 2010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 줄 전시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다시 태어난다면 도공으로 살고 싶다. 하루를 거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감동이 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가마를 열어 원하던 작품의 얼굴이 보일 때의 기쁨을 다시 태어나서도 받고 싶다”
문의 : 062-375-6771
프롤로그
때때로 온전하게 절망하고 그만큼의 몫으로 다시 일어설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주변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 일어서는 시간. 시간이 아무리 모양과 형태를 변형해 다가와도 타협하지 않을 시간. 내 스스로, 안으로 더 깊이 성찰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야 할 시간. 지금이 바로 그럴 때다.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삶의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강물처럼 몸을 뒤채이며 한 올의 실이기 전에 흩날리는 깃발로 살아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