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은 더 큰 낙인을 남긴다
사라지는 것은 더 큰 낙인을 남긴다
  • 전고필
  • 승인 2009.06.1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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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회면 영암사터에서

모든 것이 덧없는 며칠을 보냈다. 숟가락을 부단히 밀어 넣어야 하는 삶이 역겨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시는 베란다에 조기를 게양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한주를 보내고 마음속에 터질 듯한 울분을 꾹꾹 쑤셔 넣고 아무렇지 않게 일터로 나갔다. 그것 밖에 되지 못한 나를 여직 부양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면서.

그가 떠나는 날부터 도성은 벼락과 우박이 내렸고, 그의 고향에서는 장대비가 온 국민의 눈물만큼 흘러내렸다. 대기는 불안하여 저 황망한 죽음이 지닌 아픔의 의미를 아는지 전국을 떠돌며 하늘의 진노를 보여 주었다.

이윽고 그를 보내는 고향집에서, 경복궁에서, 서울광장에서 제사가 올려지자 시끄러웠던 하늘은 차츰 사람들의 마음속 진동으로 안착하였다.

그를 보낸 후 일요일, 눈부시게 맑은 하늘을 보며 합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회면 영암사지. 지금은 절의 흔적만 간직한 그곳에 가고자 함이었다.

▲ 쌍사자 석등. 불전과 천지사방을 밝히기 위해 석등을 떠받치고 두 마리 사자가 마주섰다.

함께 간 40여명의 사람들은 영암사지와 해인사만 보고 봉하마을로 가자했다. 다음에 이보다 더 마음이 아플 때 혹은 새 세상이 왔을 때 가자고 다독였다.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것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숙명일 진데 이렇게 마음을 뒤흔들고 거기에 뼈 속까지 그 정신을 각인해 주는 그분의 국민이었음이 자랑스러웠다.

황매산 자락 영암사지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국립광주박물관 초입에 모셔진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동류의 석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1933년, 수탈을 일삼은 일제는 이 석등까지 넘보았다. 단일한 암반으로 이뤄진 석등을 쪼개어 반출하는 것을 주민과 면장이 의령까지 쫓아가서 찾아왔다. 그리고 면사무소 앞 뜨락에 세웠다. 이것을 다시 1959년 주민들이 원래의 자리로 옮겨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었다.

가회면 사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의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조심스럽게 호미를 만졌다. 금당이 드러나고, 조각나 버려졌던 3층 석탑도 다시 복원해 놓았다.

훗날 동아대학교에서 발굴해 보니 회랑의 흔적이 나왔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사찰에서 회랑은 왕실과의 깊은 연관을 지녔음을 상기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영암사지는 문헌의 기록에 잘 드러내지 않는다. 왜 지어졌고, 왜 폐사가 되었는지 흔적을 알 수 없다.

▲ 사자상. 금당의 신성을 호위하는 사자들은 맹수이면서도 잘 길들여진 삽살개의 표정을 상기하게 한다.

다만 무너진 산사의 마당에 부처님의 광영을 오롯이 새긴 장인들의 숨결만이 수습된 백골처럼 드러나 있다.

그중 금당터 앞부분을 다시 네모지게 돌출하여 쌍사자석등이 배치된 곳에 주목한다. 불전을 더욱 환하게 밝혀주고 그 앞마당 삼층석탑과 발아래 사바세계까지 등대처럼 비추었던 모습이 그려질 정도다. 게다가 석등으로 오르는 계단은 마치 무지개처럼 반원의 형태로 절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굽어보면서 되돌아보는 중생의 비루함에 잠시 묵념을 올린다.

그 무지개 타고 불전에 오르는 계단에는 가릉빈가가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모습이 사면에 새겨져 도피안의 절정을 유도한다.

비록 사라진 본체이지만 건물의 기단을 이루는 석축과 남아 있는 부재를 통해 극락정토의 세계를 만들었던 당대를 연상해 본다. 기단의 석축도 본존불을 모시는 공간인 만큼 상서로운 사자를 새겨 넣었다. 한데 이 사자를 보면 꼭 삽살개를 닮은 듯 해 보인다. 위엄 보다는 친근한 개처럼 보여지는 사자의 모습에서 한없이 높은 지존과 밑으로 향한 하심을 통해 다감하게 다가오는 양극의 부처를 상상해 본다.

본당의 동쪽에는 당간지주와 법당의 흔적이 드러나 있지만 아직 묻혀 있는 것이 더 많다. 세세히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쪽으로 가니 용의 머리에 거북이 등을 하고 있는 귀부가 있다. 비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변화무쌍한 용의 무리 중에서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를 좋아하는 패희라고 하는 용이 바로 귀부의 역할을 감당한다는데, 용의 모습이 그야말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씩씩하면서도 도드라지지 않고, 수줍은 듯 하면서도 우렁차 보이는 두기의 귀부가 서쪽 금당의 이쪽과 저쪽을 호위하고 있다. 동쪽의 귀부 비석받침에는 양 옆으로 두 마리의 물고기가 고개를 땅으로 향하고 있고, 앞뒤로는 소나무를 새겨 넣어 조각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 귀부. 사찰의 역사나 스님의 생애를 등위에 짊어졌다. 그 수고로움을 즐거이 여긴다는 패희라고 불리는 용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그 금당터 앞에 빛나던 석등의 부러진 대좌가 남아있다.

사라졌음에도 골육을 통해 옛 시절을 호명하게 하는 절터에서 무언가를 살피며 걷는 내내  뒤쫓아 오는 무엇이 있었다. 민주국가를 만들려던 염원, 비록 지금 저처럼 조각나 있지만 그것을 되찾고자 염원하면 반드시 석등처럼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폐사에서 나는 유폐된 민주주의가 가회면의 주민들이 보여 주었던 열정처럼 서서히 돌아 올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두 손을 모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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