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이가 자기 안에 있는 선입견 때문에 글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가 힘들 때, 감정이입이나 몰입은 어렵다.
그러면 책이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고, 어떤 의지(꼭 읽어야겠다거나, 책을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자나, 지적욕구) 때문에 끝까지 읽어야 겠다고 마음먹어야 겨우 읽어내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묘한 재미와 부분부분의 몰입을 유도하는 소설 속의 영화라는 장치가 있어서, 독자를 끌어당겼다가 밀어내고, 끌어당겼다가 밀어내기를 반복한다. 책은 끝까지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런 책은 쉽지 않다.
거기다가 중간에 등장하는 아래 주석이 엄청나게 길어서 그냥 본문만 따라가서 읽는 데 장애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주석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석을 읽지 않으면 이 소설의 30퍼센트 정도는 놓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나는 성에 있어서 음성적이고 터부시되는 모든 것을 탈신비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마누엘 푸익)’
지구상에 가장 잔인한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은 모든 상상을 가능하게 하고,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행동도 훈련을 통해 해낼 수 있다.
인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탈신비화가 가진 마법이다. 탈신비화라는 말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세상에는 탈신비화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동물이 아닌 인간의 질서를 지키게 한다. 그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물들도 안다. 근친상간은 안된다는 것을…. 그것은 이미 유전자 속에 각인된 어떤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프로이드의 이론은 말이 안될 수도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억압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인간의 자유를 위해 프로이드적인 접근을 통한 해부가 전혀 무의미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은 지식을 가졌고, 자신의 지식으로 접근이 근절되어 있던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은 것에 접근하여 밝힌 것을 그냥 흘려버릴 수는 없다.
동성애가 반자연적이라는 믿음은 주류의 폭력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푸익은 저런 의도를 가졌고, 그에 합당한 소설을 써낸 것이리라.
읽는 독자는 낯설고, 이성애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나와 같은 독자는 몰입에 장애를 입게 되리라. 특히 읽는 동안 몰리나를 남자로 인식하고 있어서 몰리나의 여성스러운 발언이나 행동이 몰입에 장애를 주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여성화된 몰리나의 모습을 아예 여성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일시해버리니 몰입도가 훨씬 좋았다. 영화에서의 감정교류가 훨씬 용이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자는 계속에서 거리를 만들어낸다. 대화로만 이루어지다보니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오직 대사를 통해서만 상상해야 한다. 거기에서 오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 답답함은 오직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모든 남자들이 여자와 같았다면, 고문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책 45p
수다한 말들이 등장하고, 몰리나와 발렌틴의 논쟁들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저 말에 담겨 있다고 느껴진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보이는 행동은 남성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의 것이다.
희생적이고, 눈 앞에 것에 연연하는 속물적인 것, 겉으로는 발렌틴을 위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속이고 있는 여성의 속성이 다 담겼다. 그것은 약자가 가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피해의식에 물들어 있는 존재. 몰리나와 발렌틴은 둘 다 닿을 수 없는 양 극단에 서 있다. 몰리나는 철저하게 연약하고,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서 모든 것을 성취하고 감성적이고, 반대로 발렌틴은 강하며 이성적이어서 절대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지 않는다.
극단의 감성과 극단의 이성이 만나는 지점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통속적이지만, 저속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만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언어로 너무 많이 이상화된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본질이며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질이라고 필자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통속성에 물들게 될 때, 사고는 늘 평균에 차원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성적인 것에 휩쓸려서 철저한 분석을 요하는 어떤 것을 사고하는 데에 장애를 주기 때문이다. 푸익의 책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거리에 대한 푸익의 사유가 즉효했기 때문이다.
몰입에 장애를 입기 때문에 더 이성적일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푸익이 의도 했던 것이다. 푸익이 등장시키는 통속적 영화들에 대한 통속적인 판단은 금물이다.
아무리 통속적인 영화를 보더라도 자신만의 눈은 가질 수 있다. 그 눈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따뜻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인간은 자기자신을 보다 나은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문화가 폐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상태에 따라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 이 소설이 설정하는 거리는 그런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