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게 뭐지?” 처음 웹에서 작가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쉽게 털어버릴 수도 없는 느낌. 만나면, 그림을 직접 보면 굉장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확진. 끈적거려서 밀어낼 수 없는, 묘하게 피부에 들러붙는, 그러면서도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 느낌.
벽에 걸린 작품을 세세하게 들여 보다 주저앉고 만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처연함, 망루(望淚), 절망, 죽음, 생명, 절연, 인연, 혼합, 환상, 예감 등등의 이미지가 그림 안에는 분신으로 가득 차 있다. 각각의 그림들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로 문을 열어두고 발을 내밀기만 하면 서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생명의 절정을 보인다.
온 몸에 느끼는 전율. 작가의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서로 얽힌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등뼈가 서로 붙은 샴쌍둥이로 다가온다. 하나의 등뼈로 인해 서로 곧추설 수는 없지만 영원히 서로 뗄 수 없는 운명이다.
정말 오랜만에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이다. 순식간에 그림을 모두 완전하게 소화해버렸다. 작가는 대안공간인 ‘아트스페이스 미테’의 2009년 작가에 선정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절대성을 갖고 있어
“그냥 심심하고 무료해서 쉬엄쉬엄 그렸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직도 뺨의 털이 보송한 얼굴 선, 고운 작가이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 하얀 피부, 오뚝한 코가 어떻게 말릴 수 없는 고집으로 다가온다.
“전남대학을 4학기 다니다가 다시 한국종합예술대학으로 진학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야하는 일반성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한예종을 졸업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99학번이 2008년에 졸업한 것이다. 남들이 다하는 통속 개념이 제일 힘들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만든 자유로움으로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세상이 정말 자유롭게 내게 다가온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품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늘 한 묶음으로 보인다. “광적으로 죽음을 탐닉한다. 집착이라는 표현을 옳지 않다. 어떤 죽음이든, 그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와 선상에서 내 작업은 시작 되었다”며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노는 것들이 사진들이다. 죽어가는 동물 등,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고 나는 그 유한성을 탐색하고, 즐기고, 그 안에서 작업을 찾아내는 것이다”고 고백한다.
딱히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을 하며 작업하지도 않는다. 이미 온 몸에 녹아들어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들이 작가가 0.3mm 펜을 드는 순간 거미줄로 뽑아져 캔버스 안을 좁혀가며 자신의 문을 열고 닫기 시작한다.
0.3mm에 생명과 죽음을 싣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작가가 만든 세상은 0.3mm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 작업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검은 펜으로 진행된다. 0.3, 0.4, 1mm가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이다. 펜의 mm에 따라 색도 깊이도 조절이 가능하다. 느낌 또한 강렬하다.
그가 만들어 낸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캥거루, 죽은 개, 죽어버린 물고기, 살아서 뛰어다니거나 어쩡한 상태로 꼬리를 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있는, 혹은 죽어서 그 무리 안에 무심한 듯 버려져 있는 하이에나, 크고 작게 부풀어 있는 풍선, 박제가 된 뿔,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 등등.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죽음과 생명이 한 몸이라는 것이다. 뿌리 하나에서 죽음과 생명이 생성되고 연결고리를 가지고 계속해서 전진한다.
작은 선들로 이루어진 생명과 죽음은 서로 이어지고 덧칠해지고 중첩되어 그만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너무 세밀하게 그려진 하이에나의 털 하나하나까지에도 작가는 생명과 죽음, 소멸과 생성을 눈물 나게 이야기한다.
모든 작품에는 명제가 없다. 단지 <One Day,>일 뿐이다. 단 하루! 더 이상도 필요 없다. 세상의 시작과 끝이 죽음과 삶, 생성과 소멸이듯 작가의 세상은 단 하루이다. 그 하루 안에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이 너무나 농밀하게 응축되어 차라리 확장되어 버린다.
<One Day,> - 세상의 모든 것. 생명과 죽음, 생성과 소멸
작가의 의식은 분화구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생각들이 목적성 없는 듯 튀어나와 분화구가 된다.
온통 검정색으로 그려진 분화구다. 세포처럼 혹은 우리 인간의 뇌처럼 수많은 분화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분화구는 각각의 특색 있는 분출을 한다. 눈물처럼 쏟아 내는 용암은 핏덩이처럼 보인다. 검은 피다. 심장에서 바로 올라 온 피는 너무 뜨거워 용암의 붉은 빛깔로 한 개의 분화구를 적시고 흘러내린다. 너무 엄청난 소용돌이가 느껴져 분화구 앞으로 선뜻 다가설 수 없다.
하이에나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다. 죽은 동물의 사체 뿐 아니라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먹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사체는 다른 동물의 먹잇감이 되어 다시 생명으로 살아난다. 죽음과 삶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닌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작은 풍선들 사이로 둥실 떠있는 커다란 풍선 위로 죽어 있는 개 한 마리도 보인다. 검정 잉크로 무심히 떨어트린 듯한 한 마리 개는 저 멀리 꿈 위에 자리한다. 작거나 큰 꿈들을 채우지 못한 채,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죽음이다. 풍선을 매달고 있는 죽어버린 물고기도 마찬가지이다. 내장이 튀어나온 이미지를 갖고 있는 물고기는 아마도 바다를 꿈꾸는 풍선을 매달았을 지도 모른다. 죽음은 다시 풍선으로 둥실 떠올라 생명을 꿈꿀 것이다.
이파리 하나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 아래 벌거벗고 엎드려 죽어있는 사람 하나 보인다. 허리와 등 가운데로 다시 나무가 자라나 가지를 친다.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밟고 하이에나 한 마리 우뚝 서 있다. 다시 소멸과 생성의 고리를 따라 순환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한다. “죽음에 관한 소박한 위령제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들 속에 감춰진 농밀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작업으로 진행한다. 한없이 빠져드는 죽음에 관한 매력과 내 스스로 갖는 욕망에 대한 껍질을 벗기고 싶다. 익숙하던 모든 것들의 부재를 가장 슬퍼한다. 거대한 풍경 사진 위로 나는 늘 내 죽음을 겹쳐본다.”며 “요즘은 그 집착마저 많이 버렸다. 비우니까 오히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림 작업이 점점 친구가 되어간다”
일시 : 12월4일(금)까지
장소 : 아트스페이스 미테
문의 : 010-9209-4460
에필로그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자리 / 그곳에 네가 처음 들어섰을 때 부서진 더듬이 한 쪽을 보았다 / 언제라도 머물 수 있는 자리 / 그곳에 네가 앉아 있을 때 다시는 / 일어설 수 없을 줄 너는 몰랐다 / 물집이었어. 그날 불길이 스쳐 / 지나간 내 등허리에 부푼 너는 / 끝내 터지지 않을 물집이었어 - 詩이성복. 불길이 스쳐 지나간 >
죽음이란 문과도 같다. 헤어짐이 아니라 다음 세상을 맞이하는 문. 언젠가 와 본적이 있는 곳처럼 낯익은 곳. 마침내 돌아가야 할 것처럼 나를 기다리는 그곳. 내가 있는 현재는 이승과 저승의 어느 사이쯤일까.
거기도 눈이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