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최초의 ‘싸전(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인 서방시장(북구 풍향동 소재)이 문을 연 것은 1966년이다. 담양, 곡성, 화순, 함평, 멀리는 순창에 이르기까지 교통의 길목이었던 이곳에 각 지방의 미곡상 등이 모여 장이 열렸다.
주변이 모두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목재로 기둥을 만들고 천막을 씌운 판자촌 형태의 미곡상이 32곳, 그들을 위한 중개업소 10여 곳, 그 외 갖가지 한물을 파는 60여 점의 점포까지 모두 100여 점에 달하는 2천 평 규모의 제법 큰 장이었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 다음으로 큰 장이었던 서방시장은 1967년경 광주시내 유일한 미곡 전문 장으로 미곡이 정부 양곡허가제도하에 있던 70년 초까지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
시장이 생겨나기 전부터 50년 가까이 미곡상을 운영해 온(현재 ‘신성농산물’은 정식 시장이 생긴 후 내건 간판이다) 박종판(75)씨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시장이었는데…….”라며 옛날을 회상했다.
1978년 당시 서방시장이 정식 매일장으로 바뀌면서 지하 2층, 지상 2층의 최신식 콘크리트 건물이 준공됐고, 입주 희망자도 3천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하지만 7억여 원이라는 당시로선 거액의 공사비로 인해 자연스레 입주 가격이 비싸졌다. 2년여 공사기간 동안 시장주변에서 천막신세를 지며 입주를 바랬던 상인들 상당수는 비싼 입주비를 감당할 수 없어 씁쓸하게 퇴장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 일이 풍향동 일대의 발달을 부추긴 계기는 됐지만 시장에서 영세한 소규모의 장사판을 벌렸던 상인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박종판 씨는 “그때만 하더라도 장사꾼도 손님도 많았는데, 양 옆으로 줄줄이 있던 가게들이 다 문을 닫고 이 근방에는 나 혼자 남았다”며 먼지만 쌓여가는 낡고 허름한 시장 통을 바라보았다.
현재 서방시장에는 ‘신성농산물’을 포함해 단 3곳의 미곡상만이 남아있어 ‘미곡상 서방시장’이란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시장의 명성은 퇴색됐다.
박 씨는 “또 몇 년 전부터는 주변에 큰 마트들이 들어와서 그 등쌀에 못이겨 문을 닫은 가게들도 많다”며 아쉬운 감정을 말했다.
열무김치, 갓김치 등 각종 반찬이며 부식거리를 파는 가게들 서너 곳, 500원짜리 양말부터 두툼한 외투까지 진열해 놓은 옷가게, 과일가게, 건어물 가게까지 다 합해도 50점포가 넘지 않는다. 평상시든 명절이든 쉴 새 없이 돌아가던 방앗간의 기계 소리도 멈췄다.
그래도 박 할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7시 30분에 가게 문을 열고, 주변 상인들이 모두 돌아간 뒤 어두컴컴해지고 나면 문을 닫는다.
그는 “배운 것 하나 없이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여기서 자식 넷을 키워냈다”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가게 앞에는 쌀이며 보리, 녹두, 참깨, 조, 기장쌀, 차조, 메밀, 수수, 율무, 콩 등 20가지가 넘는 곡류들이 빨간색 대야에 담겨 있다.
“수시떡(수수떡)은 옛날에 나쁜 것(액) 없애고 아기를 건강하고 예쁘게 해준다고 해서 해먹었다”며 요즘 세대들은 알기 어려운 곡식 이름을 하나 하나 읊으며 설명한다. 명절이나 돌, 백일, 생일이 되면 떡은 으레 음식상에 오르는 메뉴였지만, 요즘엔 이사 때 이웃에게 떡을 돌리는 일도 드물다.
박 씨 할아버지는 “찾는 손님이 적긴 하지만 장사하면서 남 속이는 일은 없다”며 “국산이고 중국산이고 꼼꼼히 다 표시해뒀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춘 대형 할인 마트나 인터넷 쇼핑몰로 사람들은 이동했다. 조금 더 빠르고 편한 것을 선호하는 흐름을 탓할 수는 없기에 재래시장의 쇠퇴 현상은 아쉬움으로만 남았다. 시장을 찾아오는 손님 대부분은 박 씨와 비슷한 또래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이제는 용돈 벌이나 하는 셈 치고 친구들이랑 대포에서 소주 한잔 사 먹을 정도 벌이만 하고 있다”며 쑥쓰러운 듯 웃어보였다.
하지만 장사가 안 된다고 훌훌 털며 떠날 생각은 없다. 이곳에서 신혼집도 마련하고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낳아 기르고, 지금은 둘째 아들 내외가 1년 전 시장 입구 쪽에 방앗간을 차렸기 때문이다.
“시장은 50년 동안의 내 삶의 흔적이 묻어 있다. 여기를 떠나서 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아들이 다 쓰러져가는 시장에 방앗간을 차리겠다고 나섰을 때 사실 말렸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트보다 시장이 더 낫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들을 지지해 줬다. 분명 언젠가는 활기 넘치는 시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며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