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수지 근처 안개가 뿌옇다. 아직 저녁시간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겨울비와 함께한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작가를 찾아가는 번화가로 가는 길을 안개와 함께이다. 비가 내려 운전석 바로 앞도 시야가 흐리다.
작업실 겸 공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에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한지작품들이 즐비하다. 우리네 여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며 모양을 다듬었을 경대부터, 작은 공처럼 매달려 빛을 발하는 조명등, 하나하나 무엇인가를 정성을 다해 정리해두면 좋은 서랍장까지 손으로 만들어 한지를 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한 공간 안에 완성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색이다. 천년의 시간이 금방 시간을 되돌리며 타임머신을 타고 공방 안으로 들어온 느낌. 천 년 전의 온갖 이야기들이 한지를 통해 술렁이고 있는 느낌.
각종 생활에 필요한 도구부터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는 작품들까지 남김없이 모든 것을 속살로 보여준다.
한지로 만나는 생활, 한지로 재현되는 시간
사람들이 많이 지나치는 지하상가 한쪽에 작은 그만의 공방이 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곳도, 마감을 하는 곳도 이곳이다.
작가는 한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취미생활로 만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의 일부에서 벗어나 내 모든 것을 잠식해 버렸고, 이제는 한지를 제외한 시간이나 삶은 생각할 수 없다”며 “10여 년 전 한지를 처음 접하면서 한지가 내 인생을 뒤바꿀 것이란 생각은 미처 예상하지도 못했다. 구기면 구겨지고 자르면 잘라지는 대로, 내 의도대로 진행할 수 있는 작업이 단지 신기할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한지는 매우 과학적이고 편리한 우리나라만의 종이이다. 서양의 종이에 비해 흡수성이 매우 뛰어나다. 한지의 재료인 닥의 섬유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붓과 먹물을 가지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여기에 적당하도록 먹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얇고 반투명한 종이를 제작해 사용해 왔다.
서양의 종이는 물을 만나면 바로 펄프화 되어버리지만 한지는 일정량을 흡수해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한지는 섬유 사이에 적당한 공간을 지니고 있어 공기를 소통시키는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어 햇빛을 투과시키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 우리네 조상들이 문에 바르는 창호지로 사용한 이유이다.
또, 한지는 닥의 섬유질로만 만들어 매우 질기며 그 수명도 서양의 종이에 비해 뛰어난 보존력으로 천년 이상을 유지한다. 삼국시대 이후 종이를 만들어 사용한 우리나라는 책이나 그림 등 전해내려 오는 문화재나 유물들이 많은 것이 그 증거이다. 처음부터 마지막 공정까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만 이루어지는 공정이 각각의 독특한 한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상
한지를 제작하는 과정처럼, 한지로 만들어지는 공예품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수작업이다. 손톱에 붙은 풀을 따라 색실처럼 한지는 옮겨 다닌다. 간간히 오방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음각과 양각을 시용하기도 하고 깨진 항아리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두터운 문양에 한지를 입혀 금이 간 곳에 붙여 완전한 형태로 잡아주기도 한다.
초롱한 불빛으로 조명을 밝힌다. 뼈대는 나무이지만 불을 밝히는 등도 한지로 만들어지고, 뼈대인 나무 위도 결국은 한지로 마감한다. 붙이는 곳곳 어디에나 제 피부처럼 녹아들어 한지는 안성맞춤이 된다.
작가는 “한지는 우리 생활 안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심지어는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며 수의로 사용하기도 한다. 천연염색 한 한지는 너무 아름다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웃는다.
공방 안, 수강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손톱에 검정 한지 조각들을 묻혀가며 풀을 바르고 찢거나 오려 붙이며 자신만의 작업을 완성해가는 뿌듯함이 얼굴에서 보인다.
한지공예에서 지호(紙戶)공예로 다시 들어서다
요즘 작가가 집중하는 것은 지호이다. "일반적인 한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고색으로 표현된 작품들이 어디가나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나만의 독특함과 색깔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전통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현대와의 접목. 나는 그것을 하고 싶다"고 지호공예에 대한 열정을 토로한다.
지호공예는 한지를 잘게 찢어서 물에 불려 찹쌀 풀과 반죽한 다음, 자신이 성형하고자 하는 틀에 조금씩 붙여가며 그 위에 삼베를 붙이고 다시 한지 반죽을 붙이는 작업을 반복한다. 성형이 끝나면 말린 후, 마지막 공정을 기다린다. 건조가 되면 골격에서 떼 낸 후 그 위에 아크릴릭이나 옻칠을 한다.
예전, 우리 선조들은 잘 건조된 지호에 들기름이나 콩기름을 먹여서 충해를 막고,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위에 오방색의 색지를 바르거나 각 종의 건강이나 지손의 다산, 무탈을 비는 문양으로 장식하여 사용했다. 그릇이 귀한 농가에서 함이나, 합, 표주박, 반짇고리, 과반 등을 만들 때 주로 사용했고, 가장 흔하게는 탈을 제작하는데 주로 쓰였다.
작가는 옻칠을 주로 사용한다. 공예인들이 재료가 무엇이든 가장 어려워하는 달 항아리도 지호로 만들어낸다. 작가는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근 1년 동안을 달 항아리에 마음을 두었다. 작업 후 나오는 가지각색의 조각 폐지들을 모아 두었다가 한지 죽을 만들고 다시 색을 없애기 위해 삶고, 맑은 물에 헹구어내는 과정의 반복이었지만 만들어진 달 항아리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고백한다.
옻칠을 한, 지호 달 항아리는 오묘한 빛을 전달한다. 붉은 빛으로 마감된 옻칠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빛깔을 달리하며 영롱한 색으로 변해간다. 감칠 나게 변해가는 옻칠의 빛깔은 지호에서 더 윤택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2009년 작가는 지호로 작업한 달 항아리 작품으로 전국공예품 대전에서 중소기업청장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국제 한지디자인 공모전 초대작가로 활발한 활동 중이다.
문의 : 010-2653-3700
에필로그
사는 일을 생명을 버리는 일이다 / 나무의 나이테처럼 / 껍질을 벗으며 생명을 버리는 일이다 / 사는 일은 과자부스러기처럼 / 매일매일 부스러기의 시간들이 / 마음의 먼지들이 흔적 없이 / 떨어져가며 / 시시각각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 겨울나무가 나뭇잎을 버리고 / 빈 가지로 헐벗어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 차디찬 겨울을 견디는 것처럼 / 탐스러운 열매 하나를 위해 / 조금씩 늙어가는 일이다 / 잘하고 못하고의 일은 모두 껍데기일 뿐 / 실은 모두 잃어가며 / 버려가며 / 하나의 시간으로 달려가는 일이다 / 안녕이라고 말하는 / 하루를 바라보며 울고 웃으며 / 사는 일은 그렇게 / 모두를 버려가는 일이다. - 詩. 생명을 버리다. 作 박상미
지구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머무르고 있지만 떠나있는 듯. 떠나있지만 머무르고 있는 듯.
기억에 바람개비를 달아 돌린다. 기억이 바람에 매달려 하나 둘씩 떠나간다. 가거라. 내 것이었지만 내 것 아닌 것들아.
기억들을 묻고 돌아오는 길. 내리는 하얀 눈이 소복 같다. 길 위에 길게 누운 내 척수에서 모든 기억들이 한 움큼, 한달음에, 한꺼번에 빨려나갔다. 붙잡을 수 없었다.
모두 죽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