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메(花山·화산). 봄이 되면 산자락마다 붉은 진달래꽃이 그득하게 피어난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꽃메’란다. 법정동으로 광주 동구 지원동의 관할 하에 있는 용산동은 192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강리와 화산리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우리 마을에 아파트는 안됍니다’라고 조악하게 쓰여진 굴다리를 지나 들어선 마을은 오고가는 인적이 드물어 스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마을 초입에서 텃밭을 갈고 있던 마을 최고령 어르신 김용백(84) 할아버지가 마을의 유래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주민이었다.
흙 묻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선 김 할아버지가 하나 둘 마을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살았으니, 김 할아버지를 이 마을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할아버지가 어려서도 40~50호 남짓했다는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10여년 전 마을 건너편 ‘작은 꽃메’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고 뿔뿔이 흩어질 때도, 2순환도로가 마을 입구를 관통하고 지났어도 꽃메마을 만큼은 큰 화(禍)를 면한 채 시난고난한 세월을 버텨냈다.
꽃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안산과 분적산에는 이름도 유래도 다양한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들이 있다. 김 할아버지는 “마을 주변 산에 명당자리가 많아서인지 일제시대 때부터 고시에 붙은 사람, 교장, 군수,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즐비했어.”라며 마을자랑을 했다.
때문에 집 마당이나 넓은 터에 쌓아두는 곡식단인 노적처럼 생겼다는 데서 노적봉이라 불렸던 마을 뒷산 이름이, 명사(名士)들 때문에 오죽하면 필봉(筆鋒)으로 바뀌었을까. 배고팠던 농촌 시절엔 뾰족한 봉우리가 볏가리를 가득 쌓아놓은 노적봉이었으면 싶었던 바람이, 입신출세가 제일이던 시절에 붓 모양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꽃메마을 주변으론 필봉 말고도 풍수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실제로 금광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금이 많이 난다는 전설이 서린 ‘금난골’, 누군가가 자리를 잘 써서 타향에서 크게 성공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도장굴(‘도장’은 곡식을 쌓아놓는 광이라는 뜻)까지. “다 옛날 어른들이 선대부터 전해 듣던 얘기들이지. 지금은 위치도 알 수 없지만 명당자리가 많았던 건 사실이야.”라고 말했다.
그중 탐진 최씨와 명당에 관한 얘기는 흥미로웠다.
“최 씨들이 이 산에 묏자리를 많이 봐놨는데, 욕심이 과해 그만 구덩이를 깊게 파는 바람에 아래 있던 물길이 뻥 뚫려 거그서 잉어 세 마리가 튀어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거야. 그 자리도 참말로 명당 자리란디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이 밖에도 곡식을 찧는 농기구 방아에서 온 방애명당, 찧은 곡식의 알맹이와 껍질을 구분하는 채에서 따온 치명당, 쌓인 곡식을 탐내는 산적이 우글댔다는 산적골 등 김 할아버지 입에서는 길 따라 물 따라 이어지는 유서 깊은 지명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농경시대가 지나면서 이제는 ‘명당’도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가 돼 버렸고, ‘마을’도 그 모양이 많이 바뀌었다. 한 우물을 쓰며 옹기종기 모여 살던 뙷집들은 사라지고 전통양식으로 지은 고가(古家)도 이제는 서너 채밖에 남지 않았다. 작년엔 마을 한가운데에 노인요양원과 신식 절이 들어와서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좀 그렇잖어? 동네 한 가운데에 저런 건물이 있으니. 사람들이 이제 들어올라고 안하더만. 이제껏 별 탈 없이 살던 나야, 개발이나 발전이나 그런 거 모르고 그냥 남은 날까지 좋은 공기 마시며 살다 가면 그뿐이지.”
김 할아버지는 “이 마을이 다른 데보다 확실히 공기는 좋아. 그렇지 않은가?”라고 흡족해 했다.
김 할아버지가 한 시간 가량 ‘명당’자리에 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도심 속 작은 농촌 마을 ‘꽃메’마을. 이 곳이 그 누군가가 꿈꾸던 ‘명당’은 아닐까.
올 봄엔 텃밭에 깨를 심을 것이라며 고령답지 않은 정정함을 과시하는 할아버지도, 형제들 대부분 60살도 안 돼 요절해 버렸다는 부인이 여든이 넘도록 건강한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