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놀다’
‘흙과 놀다’
  • 범현이
  • 승인 2010.04.1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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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닮아가는 도예가 김혜옥(43)

프롤로그

돌아오는 길. 때 아닌 눈발을 만났다. 4월의 눈이라니. 내리는 눈발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먼저였다. 디지털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차를 세워두고 내리는 눈을 찍는다. 들여다 본 렌즈 밖, 시야가 온통 뿌옇다. 겨울이어야 보는 눈. 겨울에 내려야 할 눈이 목련꽃, 벚꽃 가득한 4월에 만개한 꽃들 위로 내려앉아 더께를 만든다.

꽃샘추위라고 했다. 작가를 만나러 가는 동안에도 운전대 위 손이 겨울처럼 곱았다. 그래도 봄인데 하는 생각으로 가던 시간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오전, 오후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온갖 색깔로 변하는 것처럼 날씨 역시 인간의 마음과 닮아간다. 오염되어 간다.

한때 자주 갔던 곳에 작가의 공방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아마 1년 넘은 시간들을 보냈으리라. 암담하기만 하던 시간들이었다. 쓰레기 봉지를 가득 채워 버리고 그곳을 떠나온 후, 단 한 번도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었다.

며칠 전, 두 시간 넘게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던 것을 기억한다. 늦은 밤이었고 도자기와 나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작은 도자기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흙이 아니라 영혼이야. 꽃이야. 문을 열면 보이는 자욱한 안개야.

그리고 오늘, 통화를 하고 작가를 만나러 간다. 작은 도자기들과는 달리 큰 손과 융성한 눈빛을 가진 당당함이 통통 튀며 나를 맞는다.

낙루(落淚)같은 도기로 피어나다

바로 작은 언덕이 하나 보였다. 무작정 올라가 보았다. 몇 년 전까지도 눈에 보이지 않던 학교가 들어서 있다. 얼기설기 놓여 진 학교로 향하는 작은 돌계단 사이로 보랏빛의 제비꽃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유심히 눈길을 주지 않으면 존재조차도 모를 꽃, 제비꽃. 보라색 꽃잎. 작가의 공방은 바로 그 작은 제비꽃과 마주하고 있다.


1층. 통유리 넘어 지나는 사람처럼 사발과 말차 잔들이 놓여 져 있는 키 보다 높은 장식장을 들여다본다. 각각의 사발과 말차의 선이 다르다. 비스듬한 선, 뭉툭한 선, 가느다란 선, 굵은 선, 막사발 느낌,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느낌, 수려하지만 둔한 느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도예를 하는 곳 같지 않게 깔끔한 바닥이 인상적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곳만 보다 하얀 바닥을 만나니 발이 어디를 디뎌야할 지 혼란스러워한다. 넓지 않은 공방 안에는 서로 겹겹이 껴안고 포개져 있는 도자기들이 눈에 보인다.

오랜 시간동안의 다양한 작업들이 눈에 보인다. 물레와 수작업이 공존한다. 작가는 “물레도 좋아하지만 수작업을 하면 더 즐겁고 행복하다. 그저 흙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게 있어 도예는 흙과 노는 놀이일 뿐이다. 같이 놀아서 즐겁고, 같이 놀 수 있어 행복하다. 더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물레는 물레대로 다양한 형태의 조형으로 선반 위에 놓여 있다.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찬기와 밥, 국을 담을 수 있는 주발 세트, 찻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수작업은 좀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작은 다관세트에서부터 한 송이 꽃을 꽂을 수 있는 수반, 향을 피울 수 있는 꽂이, 화병, 차를 넣어둘 수 있는 차호와 다관 등이 각각의 특성을 유지했다.

흙은 모성 - 여성성으로 다시 태어나다

어디에서나 주기만 하는 흙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다. 흙 안에서 먹고 마시며 자고 작업하는 작가 또한 어머니의 품 안에서 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다. 작가의 작업 특징은 여성성이다. 여성이 갖는 단지, 섬세하고 미려한 생활의 편리함만이 전부가 아니다. 들여다볼수록 우리의 어머니의 모성과 자애로움이 주는 여성성이 돋보인다. 부드럽지만은 않다. 때로는 투박하고 한없이 미소를 머금게도 한다. 너무 익숙한 표정도 있다. 투정만 부리는 어린아이가 아닌, 스스로의 갈 길을 찾아가는 정체성 강한 어머니의 딸이다.

수작업으로 만들어 낸 도자기에는 작가의 그런 마음들이 잘 들어나 있다. 흑토를 사용한 작은 호리병 같은 화병에는 갓 피어난 물오른 실버들 몇 개 흘러내린다. 화병의 어머니가 젖을 주어 막 새싹을 틔워낸 것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지 않은 울퉁한 선들은 어머니의 손을 그대로 닮았다. 감출수도 없이 선명한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를 연상하게 하는 화병의 선들이 그래서 더 정겹다.

과반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방금 흙을 떠 낸 자리에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모래바람 이는 황량한 사막, 바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막의 그림자인 바람의 선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아니, 어머니의 이마에 각인된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주름이 되었다. 바람이 만든 선은 어머니의 없앨 수 없는 생애의 과정인 주름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한복의 미려한 선들을 주조로 작업한다.”며 “편안함은 기본이다. 유약의 색상에 가마 안 불의 오묘한 조화, 디자인까지 여성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고 말한다.

새 한 마리 날개를 펴고 날아가다

작은 새 한 마리 과반 위에 앉아 있다. 작가의 작품 이곳저곳에는 새 한 마리가 그저 무심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듬성하지만 메시지가 강하다. 날개가 없어 날 수는 없지만 이미 보이지 않아도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날개는 작가의 마음이다. 자기만의 영혼을 새에 실어 작가는 작품 한 쪽에 새를 앉힌다. 새는 작은 그림자로 되살아 나 앉아있기도 하고 한 쪽에 가만히 매달려 있기도 한다.

작은 오리도 있다. 통통한 궁둥이를 한 오리는 과반과 다기들 사이를 헤엄쳐 다닌다. 하늘을 향해 부리를 들고 있는 오리 역시 작가 자신이다. 백자 소지를 사용한 오리는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 흙과 흙 사이에서 놀며 날아가고 싶은 작가를 닮았다.

타래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역시 자연을 그대로 담았다. 부조로 새겨진 도자기 표면에는 바람이 보이고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어머니의 품인 흙이 보인다. 꽃도 보이고 물도 보인다. 흙으로 만들어진 도자기에는 역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염원과 흔적을 담았다.


“흙과 놀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가 받는 흙의 느낌을 사람들이 더 많이 즐기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흙과 같이 평생을 놀며 늙어가겠지만 나만이 아닌,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흙과 같이 행복해지고 즐겁게 같이 놀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작가는 2010년에는 지금까지 해 오던 호롱 작업에서 더 진화한, 천장에 매달수도 있고, 바닥에 그냥 두어도 아름답게 어울리는 등 만드는 작업에 전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문의 : 016-9884-2208

에필로그

이제 그만 내려와 줘요 / 숨을 곳이 없어 / 별들은 팔 다리마저 다 자르고 / 저렇게 눈빛만 살아 캄캄하게 빛나요 // 인연을 모두 자르고 나니 / 눈물만 자꾸 타들어가요 / 아직도 나를 타고 오르는 게 있나 봐요 // 목숨을 꼴깍 삼킨 뒤에도 / 산자락엔 / 층층 난간의 무덤이 생기고 / 저기 흙 계단이 다져 지내요 // 무덤 풀 위의 벌레 알처럼 맺힌 새벽이슬 / 누군가 그 눈알을 밟고 / 저 가장 어둡게 빛나던 별에게 올라간 적이 있을까 // 사다리 발판 몇 개가 부서진 이곳 / 죽을 때 까지 / 한 번 타고 오르지 못한 채 / 어제는 부러지고 오늘은 삔 채 / 썩어가는 시간의 나무다리에 각목 붕대를 잇대주고 있네요. - 詩 사다리가 있는 풍경. 作 유종인

내리는 눈발 속, 사물의 모양이 보이지 않아. 빛의 일렁임만이 보일 뿐. 그저 흐르다가 활활 타 올랐어. 넓어 보였고 그저 아득할 뿐이었어. 눈이 내리면 뭐해. 덮어도 덮어도 다 덮어지지 않는 세상이야. 삶의 시간 속, 평면도 안에는 무안함도, 무색함도 모독도 들어있어. 이미 마음은 죽고 아직 몸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낮게 낮게 엎드려 일제히 소리를 질러. 비명은 만개한 봄꽃 위로 먼지처럼 소리 없이 내려 앉아.

다시는 살(肉)로 태어나지 말자고.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고 날개를 접으며, 나는 새벽바다를 향해. 날고 싶은 나라로 머리를 눕혀. 가만히, 아득하고 막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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