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그 말씀만으로 눈물이 그렁거린다. 영산강하에서 나고 자랐지만 스물이 꼴까닥 넘어가기 전 이곳저곳을 탐닉하다 그 강변의 한 사찰에서 넋을 놓고 강물을 바라보았던 기억 선연하기 때문이다.
가끔 여행은 그런 추억을 더듬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이번 행보는 추억의 저편에 모습과 자못 대비되는 오늘의 모습을 보기 위함도 있었다. 4대강 사업으로 이곳저곳이 난리를 치르는 가운데 이 땅 어딘들 안전한 곳 있을까마는 유달리 그 남한강의 여주는 주목을 받아왔다. 커다란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곳에 자리한 신륵사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이들의 중심지 역할까지 도맡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절은 여여했다. 들입에 다양한 플래카드와 한국작가회의 작가들의 죽어가는 강을 살리기 위한 시어들이 말씀의 사원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은 사찰이 지닌 역사를 들춰보며 오늘에 비교해 보는 버릇을 지닌다. 고려 말 양주 회암사에 주석해 있던 나옹화상은 당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대상이었다. 선방에 앉아 경전과 씨름하며 당대 권문세족과 담합하는 스님이 아닌 현실의 문제에 당당하게 나서고 해결하는 그런 스님은 당연히 백성들에게 우러름의 대상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하여 임금 우왕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에게 다른 절로 떠날 것을 명한다. 경기도 땅에서 멀리 경남 밀양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 스님은 노중에서 병을 얻고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세수 57세, 법납 37세의 짧은 생애, 그분의 죽음을 두고 자연사가 아닌 타살로 바라보는 견해도 남아있다.
왕의 시기심과 질투와 견제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 지는 부분이 있다. 이순신이 그러했고, 조광조와 정여립이 그러했다. 오늘 이 시대의 강남 봉은사 명진 스님이 어쩌면 그렇게 닮은꼴인가 싶어진다.
그 강물 바라보는 곳에 나옹선사의 호를 취한 ‘강월헌’이라는 정자가 온갖 풍상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장쾌하게 바라보던 눈맛 시원한 곳이 아직 그대로임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 옆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바로 위에는 다층의 벽돌탑이 있다. 남도에서는 벽돌탑을 모방한 것만 볼 수 있는 처지이지만 여긴 고려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벽돌탑이 여전하여 당대의 탑들이 어떠한지를 세세히 살펴 볼 수 있다. 이십 여 년 전 배가 볼록하여 금방 터져 버릴 것 같은 모습은 언제 손을 보았는지 건강한 제 모습을 찾아 여간 고맙다.
이 탑으로 인해 신륵사의 다른 이름이 ‘벽절’이라 칭했다고 한다. 탑이 본디 법당의 앞에 서 있음이 타당한데 이처럼 법당이 아닌 강안에 서 있는 것은 지세를 비보하기 위함과 또 하나의 목적으로 강길을 운행하는 배들의 좌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 아닌가 싶다.
여강이라 불리는 남한강을 절집 마당 삼는 신륵사에는 놓치면 아쉬운 것들이 많다. 지공대사와 나옹화상, 그리고 그의 법맥을 이은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셔 놓은 조사당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사당 앞에는 나옹을 그리워하는 무학대사가 심어 놓았다는 향나무가 조신하게 조사당을 빛내고 있다.
그 뒤편 산언덕을 오르면 나옹화상을 모신 부도가 자리한다. 그 형태를 석종형 부도라 하는데 전라도 땅에서는 전북 금산사의 방등계단에서 만날 수 있다. 창창한 소나무 숲이 푸른빛을 띠며 부도를 감싸고 있고 부도 앞에는 스님의 생애를 담은 부도비와 늘 스님의 행적을 감싸 안는 석등이 화사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강월헌에서 느끼는 눈 맛이 일품이라면 이곳 보제존자 석종 앞에서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삶의 고결함에 절로 숙연해 지는 공간의 특색을 지닌다. 이 시대의 고승들은 어디에 계시는지 한번 찾아뵙고 무장해제 된 마음의 결을 죽비로 맞으며 다시 각성하고 새로운 삶의 좌표를 찾고 싶어지는 그곳이다. 그 성스러운 공간을 나와 이 절의 주공간 극락보전을 찾아본다. 수리공사 중이지만 8층으로 구성된 용마와 구름과 물결이 새겨진 대리석 다층석탑은 본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현 시대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도 종교와 국가권력과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였을 터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절 신륵사를 방문하고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고달사를 찾았다. 불모였던 고달이라는 이가 신력을 다해 조성하고 그 자신 또한 머리를 깎고 입적했다고 하여 고달사라 칭했다고 하는 이곳에는 고려의 웅혼한 힘들이 넘쳐흐르는 불상의 받침과 원종대사의 부도비를 만날 수 있었다.
남한강이 토해낸 충적평야의 기름진 땅과 마르지 않는 강물을 끼고 살아온 여주와 원주에서 사십이 넘은 나는 고려를 지탱했던 정신적 지주들에 대한 굳센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은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한 번 내가 믿고 귀의할 스승을 찾고 싶은 서원을 세우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