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교동
지난해 함께 휴가를 보낸 후배와 내년에 경주를 가자고 약속을 했다. 모두 초등학생 가족을 둔 이유도 있었지만, 두 남자에겐 남산을 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계산에 넣은 것이었다. 1박2일로는 부족해 2박3일이나 3박4일까지 약속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바람이 발목을 잡았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보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가족은 결국 함께 오지 못했다.
결국 우리 가족들만 두 대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도로가 꽉 막힐 거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순조롭게 경주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경주시내의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차는 도로와 주차장에 즐비했고 애써 경주에서 밥을 먹으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겨우 시내의 한적한 곳을 찾아 늦은 점심을 마치고 그들처럼 우리가족 또한 탐방의 길에 들어섰다.
첨성대, 에밀레종, 안압지, 분황사, 황룡사지, 계림, 대능원 등 수학여행 때 만났던 그곳들을 다시 복습하듯 찾아 다녔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처럼 실실 다니고 설명을 생략한 부모나 삼촌은 없었다. 어느 곳에서는 역사 선생인 듯한 이가 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향해 신라의 역사와 이 유적이 갖는 의미에 열변을 토하고 있기도 했다. 가장 사람들이 운집한 장소는 역시 국립 경주박물관이었다.
그런 교과서적인 여행은 곧바로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럼에도 지켜보는 조카들의 초롱한 눈빛 때문에 마지막으로 경주의 최부자집까지 다녀왔다. 그 최부자집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사실 그 모든 유적들보다 눈부시다는 내 신념 때문이었다. 우리 남도에도 그에 버금가는 가문이 있지만 우리는 그 속내를 미쳐 다 보지 못하기도 하다.
이것이 지금은 비록 초라해 보이지만 아직도 과거의 기풍을 유지한 경주 최부자집이 보여주는 하나의 교훈이었기 때문이었다. 낱개의 이유들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했다.
진사 정도의 학식을 가지면 비록 권력은 없지만 결코 깔보지 않는 지역의 명사로서 위상을 찾는데 벼슬을 하게 되는 순간 고의가 아니더라도 적을 만들게 된다는 점, 재산이 가정을 유지할 정도면 되지 넘어서면 주위의 비웃음을 사고 인심을 잃는다는 점, 과객은 오늘날로 치면 트위터와 같이 지역과 전국의 정보를 몰아다 주는 메신저라는 점, 흉년에 불쌍한 농민들이 싼 값으로 논을 내 놓고 생명을 유지하려는데 그 땅을 사들이는 짓은 파렴치한 행위라는 점, 며느리들로 하여금 검소한 생활을 몸에 베이게 하려는 점, 근동에 사람들의 생활을 내 가족의 생활처럼 보살피며 공동체적 삶을 살라고 하는 점 등이 그 가훈 안에 담겨 있는 것이라 말해 주었다.
그런 집안이었기 때문에 10여대에 걸쳐 부를 유지하고도 손가락질 한 번 받지 않으며 지역의 칭송을 받고 성원을 얻으며 후진을 양성하는 현 영남대학의 전신인 청구대학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데 이 남도에도 그런 집이 있다. 담양 창평의 춘강 고정주의 삶도 이와 닮았다.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주민을 위해 오늘날로 치면 생협과 같은 것을 만들고 그곳에서 물품을 저렴하게 구매하여 일제의 횡포를 막았고 고리채를 하는 못된 관행을 바로잡게 했던 창평상회를 설립했다. 거기에 창흥의숙, 영학숙과 같은 교육 시설을 만들어 미래 인재의 요람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구례의 운조루 또한 마을 사람들의 출입이 용이한 곳에 뒤주를 두고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그 누구도 필요한 만치 뒤주의 쌀을 가져가 굶주려 죽는 이들이 없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이 이 땅을 살려낸 것이라는 설명까지 마치고 하루의 일과를 정리했다.
왕복 세 시간 정도가 걸리는 등반의 길은 험난했지만 고도를 바라보며 불국토의 염원을 담은 스무 살 무렵에 처음 뵈었던 그 분들은 아직도 여전하였다. 그 보드라운 미소에 삼배를 올리고 다시 하산하여, 탑산 마애불 조상군과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를 담은 감실부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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