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두 편의 광채
서정시 두 편의 광채
  • 김종 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1.12.26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투사 방원 김용환 선생에게 가는 길

 

지난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의거 제82주년이면서 독립투사 방원 김용환(方圓 金容煥, 1900-1969) 선생의 탄신 111주년을 보냈다. 선생의 탄신 111주년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최근 방원 선생의 자작시 <달님>, <그리워서> 등 2편이 발굴되어 방원 선생의 업적과 함께 작품을 평설 형식으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초생달 그- 모양이/낚시[釣]같도다./큰물에 빠져서/헤매이는 나를/건지소서/恩惠의 낚시여//반달은 그- 形象이/빗[櫛] 같도다/處女의 머리같이/煩憫의 내 頭腦도/빗기소서/보비[補備]의 빗이어//보름달 둥근 복판/桂樹를 찍어다가/平和舟 무워/온人類 태우고/靈苑 가랴니/生命의 달이어.

馥郁(복욱)/1923(癸亥)年 6月15日夜 作 <달님>전문

 이 작품이 창작된 계해(癸亥)년은 1923년이다. 이 해는 새해 벽두부터 임정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서 국민회의를 개최하였고 동경 유학생이나 블라디보스톡 교포들이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이 암중모색되는 시기였다.

   
▲ 1925년 4월 광주YMCA 이사 재임 당시 방원 김용환 선생은 뒤쪽 오른쪽부터 세 번째. 사진=전 청화대 인사수석 정찬용 제공.
문학사적으로는 김억의 번역으로 타고르의 <기탄자리>를 간행했고 최초의 극영화<월하의 맹세>를 감독 윤백남(尹白南)에 의해 무대에 올렸다. 특히 민족 시인 김소월의 <임의 노래>,<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등의 작품들이 창작되고 있었다.

위의 작품 창작 당시에 방원은 23세의 청년이었고 현진 최현숙(賢眞 崔賢淑, 1903-1984) 여사와 결혼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현진 선생은 1919년 3월 10일 광주 3.1 의거의 최선봉에 섰다가 체포․구금된 광주 3.1 의거 최연소 독립투사이다.

위의 작품이 쓰이던 때 방원은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 광주 청년회 의사원,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교육부장, 광주 흥학관 교사로서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했다. 현진은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 광주 흥학관 교사로써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과 빈민구제를 펼치던 때였다. 그러니까 <달님>은 방원과 현진이 위의 활동을 펼치며 연정을 키워가면서 창작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문예사조적 흐름은 3.1운동을 체험한 문인들에 의해 요동치듯 『창조』,『폐허』,『장미촌』,『백조』등 문예지들이 발간되면서 여러 문학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1923년을 넘어서면서 동경유학생이던 김기진에 의해 사회주의적 각성이 이입되었고 새로이 배태한 민족주의와의 길항이 예비되고 있었다.

방원 선생의 창작 배경은 이들 흐름과 연관적 개연성이 감지된다. 방원은 일제 때는 비타협․민족주의적 노선을 철저히 견지한 항일독립투사 내지는 독립지사였고 해방 이후는 반독재 인권수호투쟁에 일관된 생애를 바쳤다.

1927년에 설립한 신간회(新幹會)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방원은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빈민구제․구라사업․민중계몽 등을 가열차게 전개하던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를 창설하고 제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같은 정황에 비추어 방원은 일찍부터 국내외적 흐름이나 전개에 동참했거나 두루 밝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작품 <달님>은 3연 18행의 전개를 보인 전형적인 서정시이다. 작품적 구조는 ‘초생달’에서 ‘반달’을 거쳐 ‘보름달’의 단계에 나아가면서 자신의 생각들을 발전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우선 ‘초생달’의 구부러진 형상을 낚시로 본 것이 재미있다.

그 낚시로 ‘큰물에 빠져서/헤매이는 나를’ 건져(구원해)달라는 애원조의 표현들이 1연에서 읽힌다. 2연은 빗[櫛] 모양의 반달로 시작한다. 빗 모양의 반달로는 살아가면서 맞부딪친 내 ‘두뇌’의 여러 번민을 ‘처녀의 머리같이’ 가지런히 빗기려고 미리 갖추어 두었다고 했다. 3연에 오면 ‘보름달 둥근 복판’이 나오고 그곳의 계수나무를 찍어다가 ‘평화주(舟)’를 짓고 ‘온 인류를 태우고’ 평화의 땅 달나라까지 가려 하니 ‘생명의 달이어’ 보살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담아내고 있다.

<달님>은 그 자체로 ‘은혜의 낚시’이며 ‘보비의 빗’이며 ‘생명의 달’이다. 그러니까 이같은 단계적 상승과 향상을 통해 원만구족의 단계로 나아가는 점진적 이상성을 보여준다.

▲ 1960년 여름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 앞에서.
작품속의 ‘달님’은 두 가지의 의미역(域)이 가능하다. ‘달님’은 ‘나’를 구원하던 즉자성(卽自性)의 단계에서 ‘온인류’까지 목표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라는 동양정신의 교훈성을 읽게 한다. 이는 좀더 깊게 보면 “은혜의 낚시인 달님이여 큰물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나를 구원해주시고 미리 마련된 빗[櫛] 같으신 달님이여, 갖가지 갈등을 가지런히 빗어주시고 찍어낸 계수나무로 평화의 배를 지어 무겁더라도 온가족을 싣고 저 밝은 생명의 땅 달나라까지 가려하오니 부디 도와주소서”로 풀이 된다.

다른 해석 또한 비슷하다. 자신의 정황에 비추어 탈취당한 조국을 두고 갈팡질팡 허우적이는 자신(화자)을 바로 잡아주시고 번다한 심적 갈등까지를 가지런히 빗어내어 무겁더라도 평화의 배에 온인류(겨레)를 싣고 달나라까지 무사히 가려하니 점지해 달라는 유토피아 지향의 기원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그윽한 향기를 드리며’의 의미인 ‘복욱(馥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작품 속의 ‘달님’은 세 가지의 해석에 나아갈 수 있겠다.

첫째는 ‘절대자’로써의 ‘달님’이다. 큰물에 빠진 화자는 대단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은혜롭게 건져달라는 기구(祈求)의 대상자는 절대자일 경우이다. 그리고 초생달에서 보름달까지의 변환성은 능소능대, 전지전능, 능치 못함이 없다 등 자유자재한 능력의 소유자를 의미하겠고 그래서 절대자라는 해석이 도출된다.

둘째는 살아오면서 항시 기대고 의지하던 배경같은 조력자로서의 ‘달님’이다. 여기에서 ‘달님’은 다분히 3자적이며 여러 경우에 도움 받았던 사람의 지칭이겠다.

셋째는 반려자로서의 ‘달님’이다. 밤길 걷는 자에게 ‘달님’은 반려자처럼 동행한다. 내 집에서 동행하던 달은 미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에서도 보살피고 지켜주는 구원자처럼 일정한 거리에서 동행하는 반려자이다.

해석 여하에 따라 세 가지 경우를 상정했지만 ‘달님’의 존재적 의미는 첫째 아니면 셋째일 개연성이 크다. 방원 선생은 결혼 전후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그런 연유로 결혼식 주례에 오방 최흥종 목사를 모셨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구주강생(救主降生) 1924년 8월 11일이 명시된 주례 최흥종 목사의 혼인서약서가 그것인데 당시는 모든 문서에 일본의 연호 대정(大正)만을 사용할 때인데도 당당히 ‘서기(西紀)’를 ‘구주강생’으로 문서를 작성한 점이다.

그 무렵 절대자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얻어냈던 방원의 신앙 정신이 이같이 ‘달님’에게로 치환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달님’을 반려자로 본 이유는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 동행중인 반려자에게 도움을 간구하는 경우이다. 유족에 기대면 방원 선생은 가족 모두에게 자별한 어버이였고 반려자에게는 지극한 페미니스트(feminist)였다고 한다. 보다 완벽한 ‘달님’의 의미는 그래서 절대자에다 반려자를 더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리워서> 만난 우리 님

다음의 작품 <그리워서>에 보면 ‘달님’에서 읽었던, ‘온인류’를 달나라까지 싣고 가겠다던 방원이 대(對)사회성 대신 ‘우리님’과 ‘내마음’, ‘내몸’을 상대화시킨 일대일의 즉자성으로 돌아온다.

 우리님을 보고 싶을때/님 계신곳과 나 있는곳을 한데다/縮地法으로 데어서/나를 님께 님을 내게 보이고 지고//우리님을 보고 싶을때/내마음 기둥이 텅텅 울리며/쇠못을 박는 것같이/앞으로 또 쓸렷세라//우리님을 보고 싶을때/온 몸이 바짝바짝 줄어지며/愁色이 짙은 얼굴은/面鏡의게 알았세라//우리님을 보고 싶을때/온 세상은 朦朧하여서/나는 孤兒와 같이/외로움을 느꼈세라//우리님을 보고 싶을때/人生도 宇宙도 또 무엇도/님 向한 나에게는/나타나지 못하였세라//우리님을 보고 싶을때/내몸이 새[鳥]로라도 변하여서/훨훨 날라 님을 찾아/얼사안고 보고지고

<그리워서>전문

 이 작품은 창작시기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속의 어법이나 시적 분위기, 표현상의 흐름에 비추어 <달님>과 동일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워서>는 3연 구성인 <달님>에 비해 6연으로 장형화된 작품이다. 핵심어는 ‘우리님’이며 내 마음 내지는 내 몸과 교호적으로 엮이면서 ‘우리님이 보고 싶을 때’를 반복하여 시적 전개를 이끌고 있다.

▲ 1946년 7월 광주상공회의소 재건 창립 기념으로. 사진 맨 아랫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용환 선생.
우선 이 작품에서 그 의미가 모호한 3개의 시행만을 평이한 어법으로 바꾸어 보자. ‘님 계신 곳과 나 있는 곳을 한데다’→님 계신 곳과 나 있는 곳을 한곳으로 하여, ‘축지법(縮地法)으로 데어서’→축지법으로 닿아서, ‘면경(面鏡)의게 알았세라’→면경에 비추어 알았어라 등 이쯤의 어구만 바꾸어도 위 작품이 지닌 선명한 흐름이 보인다.

요컨대 1연에서는 “우리님을 보고 싶을 때’는 님 계신 곳과 나 있는 곳을 한 곳으로 하여 축지법으로 닿고 나를 님께 님을 내게 보이고 싶다”는 것. 2연은 “ 내마음의 박동소리가 텅텅 울리며 쇠못을 박는 것 같이 앞으로 쓸렸구나”의 표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이 그려지고 창작자 방원 선생의 언어가 기독교적 정신과 표현에 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3연은 “우리님이 사뭇 보고 싶어서 온몸이 바짝바짝 말라가며 근심어린 얼굴은 거울을 보고야 알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4연에서는 “우리님이 보고싶은 간절함에 세상은 온통 몽롱하였고 나는 고아처럼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5연에선 “우리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인생도 우주도 그 무엇도 님을 향한 나의 일념에는 끼여들 수 없다” 하였고 마지막 6연에 와서는 “우리 님이 보고 싶을 때는 내 몸이 날으는 새로 변하여 님을 찾아 얼싸안고 보고 싶다.”로 마무리하였다.

이 작품은 일인칭 ‘나’가 주체이지만 대상은 ‘우리님’이며 여기에 해석상의 이견이 따른다. ‘님’은 사모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우리’라는 어휘가 어두에 놓으면서 ‘나’ 이외의 타자들도 함께 사모하는 대상을 이르는 광역화된 님을 의미한다. 허나 시 작품상의 표현은 대상이 개별화되어 ‘우리님’은 ‘내님’으로 바꾸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앞의 <달님>에서 우리는 방원 선생을 페미니스트로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의 창작 시기 또한 <달님>과 동일 시기일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리고 이 작품상의 정조는 다분히 연시풍의 작품으로 작품속의 ‘나’는 여성화한 남성으로 읽힌다. 이런 연유로 이 작품의 주체자 ‘나’는 ‘방원’이 분명하고 ‘내님’으로 읽히는 ‘우리님’은 앞에서 밝힌 ‘현진 선생’이 아닐까.

방원의 서정시 2편을 논의하면서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1879-1944) 시인을 상기하고자 한다. 시집 『님의 침묵』에는 절대자 ‘님’에 대한 사랑의 호소가 88편의 시편들 속에 여성적인 정감으로 스미어 있다. 이들 작품이 표출한 사랑의 언어는 세속적이지만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고 민중정신을 우렁차게 강조하지도 않은, 정감과 갈망의 언어가 반어적 저항성을 한껏 고조하고 있다.

방원 선생의 인간적 행적은 여러 면에서 만해 선사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편들이 갖는 분위기 또한 여성주의적 부드러움을 지어내며 만해의 시에서 불교의 관음사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방원에게서는 기독교적 메시아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만해의 시편처럼 방원의 시에서도 세련되지 못한 시구들이 발견되는 바 이들 시구가 외려 시적 표현의 진솔함을 돕고 있다.

방원은 청년기에 두 편의 창작시만을 남기고 있지만 이들 시편이 지닌 언어적 광휘는 문학사적 평가에 오른 시인들의 그것에 비해 취할만한 장점인 것을 살필 수 있다. <달님>, <그리워서> 등 두 편의 서정시는 체질면에서 얼마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는 대사회성과 즉자성으로 읽히면서 더더욱 다양한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