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00일(!)이 내일이다. 이 느낌표를 사람들은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까? 기다림의 버스에서 내리니 진도 실내체육관이다. 헌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이 무거움은 무엇인가. 심해의 물고기들이 바닷물의 무게로 납작하게 눌린 것처럼 슬픔의 무게로 체육관은 납작 엎드려 있었다.
기다림의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실종자가족들이 슬픔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흔연히 달려왔다. 별 하나 하나가 모여 은하수가 되듯이 이 정성스러운 징검돌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가족들이 실종자들을 찾을 때까지 견뎌낼 힘이 되어줄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외부인에게 문을 열어준 날, 오늘은 참사 99일째다. 아픔도, 슬픔도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유족들이 우리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머리 굽혀 사과드렸다. 맞절로 고마움을 표시하며 가족들이 속내를 비추었다. “마지막 한 사람으로 남을까봐, 잊혀질까봐 두렵다.” 그렇다. 어떤 고난도 어떤 슬픔도 같이 하는 동반이 있으면 나뉘고 줄어든다.
침몰한 세월호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도 단지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아이를 찾아서 당신 손으로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아버지. 우리 모두 여전히 똑같은 아버지고 어머니고 딸이고 아들이다. 색안경을 쓰고 그들을 동정할 이유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저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고 말없이 껴안으면 그뿐이다.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응원하고 있다고 바람처럼 흔적 없이 안아주면 된다. 무슨 요란한 구호도, 요란한 몸짓도 유족들은 원하지 않는다. 위로한답시고 찾아왔다가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들여다보고 일상으로 되돌아가면 그것으로 잊어버린다. 할일 다 한 것처럼.......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다짐하면서 우리는 벌써 잊어가고 있다.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맹세하면서도 벌써 마음에서는 떠나보내고 있다. 악성 댓글도 모자라서 이제 그만하라고 속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온 국민이 애도하다가, 만 명이다가, 천 명이다가, 백 명이다가, 이제 열 명의 가족만 남았다. 한 번 왔다가 가면 의무도 책임도 슬픔도 모두 벗어두고 간다. 체육관을 내리누르는 답답한 기운과 무거움은 실종자 가족들의 슬픔이 아니었다. 비장한 동정심으로 찾아왔다가 떠나면서는 옷을 벗듯이 홀라당 벗어두고 간 슬픔이 체육관에, 유가족들에게 한꺼번에 침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초들은 ‘이제 그만 당하자 그만 당하자’ 하면서 또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하며 살아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 살이 아니면 금방 잊고 내 피가 아니면 외면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민초들의 마지막 후회가 되려면 결코 잊어버리지 말고, 마지막 한 명의 실종자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고, 진상을 밝히고, 특별법을 제정하고, 의무를 태만히 한 방패들을 솎아내고 원칙에 충실하면 될 일이다. 원칙만이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왜 선진국에는 쉬운 일이 우리에게는 어려운가? 그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학연, 지연, 혈연에 목매는 우리의 뿌리 깊은 악순환 때문이다. 우리는 법을 지키기 위해 발바닥이 뜨거운 것이 아니라 법을 안 지켜도 잘 살 수 있도록 인연을 맺기 위해 발바닥이 뜨겁다. 유병언이 그 대표적 인물 아닌가. ‘세월호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참사가 막을 내리려면 또 다른 유병언이 나오지 않도록 온 국민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악성 댓글을 다는 열정으로 유병언을 잡으려했으면 죽기 전에 잡아서 단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발 남의 아픈 상처에 소금뿌리는 일 그만하자. 남의 상처가 언젠가 내 상처가 된다. 실종자가족이 말했다. “솔직히 천안함 사건이 남의 일이었노라.”고. “왜 저리 질질 끄느냐?”고 “그때의 무관심이 몇 년 후 내 자식을 수장시켰노라”고. 그러므로 이제 ‘세월호침몰’은 그들 유가족만의 아픔이고 상처고 싸움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상처고, 불찰이고, 방임죄인 것이다. 악성 댓글을 달아 유가족들을 또 한 번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키고, 무관심을 넘어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도 당해봐야 정신 차리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