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걸어요(19) 300년간 잊힌 필문 기린 필문대로
함께 걸어요(19) 300년간 잊힌 필문 기린 필문대로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5.10.11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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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길과 함께하는 ‘예쁜’ 길
조선대와 교육대를 지나는 8차선 도로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킨 필문

▲필문대로가 시작되는 남광주역 교차로.
<시민의 소리>가 이번에 걸어본 길은 필문대로이다.
필문대로는 북구 풍향동 595-1번지(서방사거리)에서 시작해 남구 학동51-1번지(남광주역)까지 이어지는 4.2Km 구간의 왕복8차선길이다.
기자는 남광주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필문대로를 왕복해보기로 했다. 광주 지하철역에선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역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신분증과 전화번호를 남기고 역무원과 자전거를 살펴본 후, 자전거를 가지고 남광주역 밖으로 나왔다.

남광주역 바로 옆엔 광주 전통시장인 남광주시장을 비롯해 전남대학교 병원, 병무청 등이 위치하고 있다. 남광주시장은 1975년에 개설됐으며, 주로 수산물(45개 점포)을 많이 팔고 있다. 또한 남광주시장은 국밥으로 유명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한번쯤은 꼭 맛보기도 한다.

남광주시장을 나와 필문대로가 시작되는 남광주역에서 조선대학교 방향 쪽으로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학기 중이어서 강의를 받으러 가는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공과대학 옆 쪽문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조선대학교 정문이 나온다. 조선대 정문에 커다랗게 세워진 구조물은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드라군’이라는 유닛과 닮았다며 드라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드라군'으로 불리는 조선대학교 입구의 조형물.
대학생 주머니 사정 고려한 먹자골목

좀 더 가다보면 M편의점이 나오는데, 바로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대 후문과 이어지는 먹자골목이 있다. 이 골목 안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4~6천 원대로 저렴하게 한 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많다. 또 ‘대학교=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술집들도 굉장히 많이 모여 있다. 밤이 되면 새벽 늦게까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조선대를 지나 조금만 가면 400m 안쪽에 광주지산동오층석탑(光州芝山洞五層石塔)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안쪽으로 300여m를 들어가 왼쪽으로 꺾어 또 100m 정도를 더 가면 오층석탑이 나온다. 지산동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으로서, 과거에는 ‘광주 동오층석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보물 제110호로 지정돼 있다. 석탑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광주고등검찰청과 광주지방·고등법원이 있다.

▲보물 제110호로 지정된 광주지산동오층석탑(光州芝山洞五層石塔)
다시 대로로 나와 길을 따라 출발했다. 무등산옛길로 이어지는 산수오거리와 두암지구 입구 교차로를 지나면 광주교육대학교가 나온다. 교육대 안에는 지난해 3월에 개관한 풍향문화관이 있다. 풍향문화관 1층에는 600석 규모의 문화예술공연장인 하정웅 아트홀이 있고, 2층에는 독도체험관, 3층엔 다문화교육체험관이 있다. 다문화교육체험관은 약간의 입장료를 받으며, 독도체험관은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개방한다.
교육대를 지나면 어느새 필문대로의 끝자락인 서방사거리가 나온다.

▲필문대로의 끝 지점인 서방사거리 전경.
농장과 교도소 잇던 다리, 농장다리

횡단보도를 건너 이번엔 반대편 길을 따라 왔던 길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산수오거리를 지나 500여m만 더 가면 저편에 ‘농장다리’로 더 잘 알려진 ‘동지교’가 보이는 지산사거리가 나온다. 농장다리는 1908년 전남여고 옆 동계천 건너편에 ‘광주감옥’이 들어서면서 그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광주감옥의 죄수들은 1970년대 이전까지 교도소에서 운영하는 채소농장에서 노역하며 농장과 교도소를 오갔다. 그때부터 이곳은 농장과 연결되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농장다리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지산사거리에서 300여m를 내려와 서석교회가 보이면 바로 푸른길과 필문대로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전국에서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오는 도심공원답게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이 참 예뻤다. 유모차를 끌며 산책하는 할머니와 이어폰을 끼고 운동하는 젊은 남성까지 여러 시민들이 푸른길 공원을 애용하고 있었다.
필문대로가 아름다운 길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푸른길 때문이 아니었나싶다.

▲푸른길 양 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예쁘다.
필문대로는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이선제(李先齊) 선생의 호 필문(畢門)을 붙여 이름 지어지게 됐다. 필문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실록’, ‘고려사’ 등을 편찬했다. 또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돼 있던 광주를 문종 원년(1451)에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해 광주목으로 복귀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렇듯 중요한 정책 상소를 올리면서 세종과 문종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멸문의 화 당하며 300년간 잊혀져

하지만 필문의 5대손인 이발(李潑)과 이길 형제가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도 불림)에 관계되면서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게 된다. 가문이 화를 당한 이후 300여년 동안 필문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졌다. 하지만 1997년 청자에 새겨진 필문의 묘지(墓誌)가 밀반출되기 직전 김해공항에서 문화재 감정관에게 필사(筆寫)되면서 필문의 정확한 생몰연대가 밝혀지게 됐다.

태종13년(1411) 사마시(司馬試. 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고, 이어서 세종원년(1419) 증광시(增廣試.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이외에 실시된 임시과거)에 급제한 필문은 집현전수찬, 형조참의,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호조참판, 세자우부빈객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필문대로와 필문이선제부조묘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필문을 모신 사당 필문이선제부조묘(畢門李先齊不祧墓)는 남구 원산동 포충사 인근 제봉산에 있다. 필문대로의 시작점인 남광주역에서 필문을 모신 사당까지는 직진 거리로 8.8km 떨어져 있다. 필문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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