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부미방,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등 본격적인 반미운동 촉발 계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9일 오후 광주광역시 ‘민주의 집’에서 당사자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 제35주년 기념모임’을 가졌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의 당사자들은 김동혁, 정순철, 윤종형, 임종수, 박시영 등 총 5명이다. 이들 중 김동혁과 정순철이 세상을 등진 때문에 이날 모임에는 윤종형, 임종수, 박시영 등만이 참여했다.
35년이란 세월의 무게는 당사자인 2명을 세상을 등지게 할 만큼 무거웠고, 이들의 빈자리는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80년 5월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80년 5월
윤종형 : 5월 18일 광주에 있었습니다. 19일 민주농정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가 북동성당에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의 임무는 최루탄으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설 수 있게 고춧가루와 밀가루를 섞어 뿌릴 수 있는 동력분무기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임무 때문에 광주에 오게 됐고요. 저는 자칭 단순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임감도 강하지요. 18일 고집스럽게 기계를 매고 가톨릭센터로 가고 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깔려있기에 순발력을 발휘해 동력분무기의 나사를 풀어놓고 능청맞게 물었지요. “고장났는데 어디 가서 고치면 되냐”고 물었더니 공수가 “빨리 가, 새끼야”라고 윽박지르더군요. 가까스로 그곳을 피해 구 공용터미널 부근 대한극장 골목을 따라 가톨릭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조비오 신부님이 “뭣하러 왔냐? 여기 있으면 죽으니 빨리 가라”고 해서 계림동 성당으로 피신했다가 서방에 있는 친구집에 가서 자고, 19일 다시 북동성당으로 갔으나 집회는 무기한 연기된 상태였습니다.
임종수 : 5월 현장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22일 발포 현장에선 총알을 피해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날 전일빌딩 벽을 주먹으로 치며 통곡을 했지요. 계림동 성당에 들어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민군에 들어가려고 결심을 했지요. 이 결심을 전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던 누나에게 전했더니 “3대 독자 외아들이 죽으려 한다”고 큰소리를 내는 통에 그곳 의사들에게 붙들려 운암동 집까지 끌려가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일도 안 나가시고 저를 못나가게 하셨지요. 이때 함께 죽지 못한 죄스러움은 평범한 한 학생의 인생을 반전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미항쟁으로써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
윤종형 : 당시 저는 가톨릭농민회 함평군협의회 총무였습니다. 가톨릭센터는 가톨릭농민회 사무실이 있어서 광주에 오면 들르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그런 와중에 김동혁 회장이 광주미문화원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묻자, 김 회장은 “작전권이 미군에 있는데 미군이 광주시민 학살을 방조했다. 광주시민을 학살하도록 작전명령을 내린 것과 같다”면서 “방관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면서 민주와 독재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접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느냐고 묻자, 김 회장은 “함께 와서 참여해주고,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저지하고, 망도 봐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9일 당일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기름통을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박시영과 함께 미문화원 쪽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으면서 망을 봤지요. 미문화원 쪽에서 불이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자 옛 그랜드호텔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요. 근데 소방차가 와서 금새 꺼버렸어요. 그래서 “오메 빨리도 꺼부러야”라고 말을 했나 봅니다. 그 목소리가 좀 컸나 봐요. 그러니까 박시영이 “조용히 좀 하쇼”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임종수 : 5.18의 상처는 대학으로 돌아간 뒤에도 아물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념동아리도 아닌 유네스코학생회 회원들에게 독서클럽을 만들자는 취지를 담아 일일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검열에 걸려 회원들이 줄줄이 서부경찰서에 끌려갔지요. 저도 연행돼 3일간 구류를 살았습니다. 이때 김동혁, 정순철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12월 5일 호남동성당에서 ‘추수감사 및 민주농촌 실현을 위한 농민대회’가 열리는데, 이 때 전대, 조대, 교대 학생 및 가농 청년회원들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깔려 무산됐고요. 당시 저는 학생동원을 맡아 20~30명을 동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획이 실패하자 가두시위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미문화원에 방화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광주항쟁이 한창일 때인 5월 25일께 도청 앞 전일빌딩 1층에 대자보가 붙었어요. 미국의 7함대가 부산항에 입항했다고,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저지하고, 광주시민을 구원하기 위해 오고 있다고, 모두들 만세와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5.18을 묵시적으로 방조했고, 미국이 배신을 한 것이었지요. 이 분노와 배신감이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게 한 것입니다. 이란에서 미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모습을 티비를 통해 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9일로 D데이를 잡은 이유는 미 국무장관 브라운이 10일 한국을 방한하는데 맞춰 경고를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8일 현장 답사를 했고요. 인명피해는 없어야 했기에 사람이 없는 건물에 불을 지르기로 했지요. 정순철과 제가 지붕에 구멍을 뚫고 휘발유와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것입니다.
박시영 : 5·18 이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 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는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하고 20사단은 한미연합사 소속이라는 근거 등이었지요. 80년 12월 5일 호남동성당에서 ‘추수감사 및 민주농촌 실현을 위한 농민대회’가 열리는데, 이 때 대학생 및 가농 청년회원들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계획했으나 무산됐습니다. 이유는 학생들이 5·18 이후 와해된 학생조직이 새로 정비되고 있는데 다시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면서 가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정순철, 임종수 등의 주도로 미국문화원에 방화 계획을 세웠구요. 저는 당일 도화선, 석유 등을 준비하여 예행연습을 했는데, 도화선을 이용한 실험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석유를 붓고 신문지로 불을 붙인 것이지요. 김동혁(전 가농 전남연합회 회장), 정순철(가농 광주분회 회원), 임종수(당시 학생, 가농 광주분회 회원), 윤종형(당시 가농 함평 회원), 박시영(당시 가농 함평 회원) 등 5명이 9일 미문화원을 방화했구요. 그날 저녁 5명이 모여 준비물을 챙겨 충장로 5가(?) 유창스넥코너(송기숙 교수 사모님이 장사를 하고 있었음)에서 식사를 하고 미문화원으로 갔습니다. 당시 미문화원 옆에 건물을 짓는 공사 중이었는데 김동혁은 건너편 그랜드 호텔 앞에 대기하고 윤종형과 저는 공사 중인 건물과 문화원으로 통하는 사잇길에서 망을 보면서 대기했습니다. 지나가는 술꾼들이 가끔 오줌을 누러 들어오면 제지하기도 했고요. 정순철과 임종수가 철조망을 넘어 문화원 건물 지붕을 뜯어내고 석유를 붓고 도화선에 불을 붙였으나 실패하자 신문지로 불을 붙였습니다. 잠시 후 “불이야”라는 소리가 나자 윤종형과 저는 그랜드호텔 앞 포장마차에서 상황을 주시했고. 정순철, 임종수는 불이 붙은 후 사라졌습니다. 약 10여 분 후 소방차가 와서 진화 했으나 잔불이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진화했지요. 다음날인 10일 아침 라디오 뉴스에 “광주 미문화원에 누전으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 후(後)
윤종형 : 전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막둥이 여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어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고, 아버지가 전남대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여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도피를 했지요. 농사꾼인데다가 수배까지 당한 상태에서 서울 생활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YMCA와 가톨릭농민회 지인들의 도움으로 목욕탕 때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목욕탕 때밀이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해결이 되니 좋았어요. 돈도 상당히 벌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광주로 내려올 때는 은밀히 수표로 바꿔 농민회 회원이었던 친구에게 돈만 주고 올라갔고요. 3년의 도피생활은 못할 노릇이었습니다. 정순철이 잡힌 후 노금노 총무에게 전화로 부탁하고 광주에 내려왔습니다. 노금노 총무는 저를 감춰놓고, 교구에 제 사정을 알렸고요. 윤공희 대주교가 검찰과 협상을 해서 불구속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임종수 : 12월 10일 학교에 갔는데 경찰이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미문화원 방화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앞서 있었던 5일 가두시위 예비 계획에 대해 순순히 불었습니다. 그런데 방화사건에 전남대생이 개입됐다는 첩보가 있었나 봐요. 그때부터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정순철 선배에게 도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이틀을 버텼어요. 김동혁 선배는 더 엄청난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동혁 선배를 쥐어짜서 가톨릭농민회와 엮어볼 요량이었던 것이지요. 이 때문에 김동혁 선배가 지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것이고요. 재판을 받을 때 “백성을 죽인 살인마가 권좌에 앉아 있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재판장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역사의 재판에서는 정의로 기록할 것이다”한 최후의 진술이 기억이 나네요. 그러니까 판사가 부르르 떨면서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하더라구요. 감형없이 꼬박 다 살고 나왔습니다.
박시영 : 12월 10일인가, 11일인가 우슬재를 걸어서 넘어 해남에 갔습니다. 해남․함평 농민 친선축구게임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날 저녁 해남에서 뒤풀이 중인데 김동혁, 임종수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왔어요. 15일께 화정동 소재 피정센터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농지세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들이 들어오지는 못하고, 포위됐다고 하면서 저를 내보내라고 하더군요. 일부에서는 어떻게 동지를 내보낼 수 있냐며 반대했지만 자수형식을 빌어 연행됐습니다. 서부경찰서에서 자술서를 쓰는데 너무 열심히 잘 썼는지 저를 싣고 가서 가택수색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글씨를 잘 썼거든요. 혹 유인물이 있는지 보러 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할머니가 벌벌 떨었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8개월 17일을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정순철은 2년 후(?) 체포됐습니다. 삼천포에서 밀항을 기도하다 실패한 후, 영광 원불교에 은신하다 체포됐습니다.
금남로에 광주시민이 흘린 핏자국이 채 씻기기도 전인 80년 12월 9일 밤. 광주시 동구 황금동 광주 미문화원의 지붕위로 불길은 이렇게 해서 치솟았다. 진눈깨비 사이로 타오르던 불길은 출동한 소방차에 의해 곧바로 진화됐고, 다음날 ‘전기누전’으로 추정된다는 1단짜리 신문기사가 실렸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 회고(回顧)
12월 9일 저녁 8시경 김동혁(작고) 등 5인은 충장로 유창스넥코너에서 저녁을 먹으며 거사시간을 9시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은 심한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유난히 몰아쳤다.
시간이 되자 임종수와 정순철은 휘발유와 석유 각 1통을 들고 문화원 바로 옆에 개축중인 오성여관을 거쳐 문화원 기와지붕으로 올라가 기와 2장을 제거하고 석유와 휘발유를 들이부은 후 불을 질렀다.
거사 후 광주공원으로 옮겨 시가지를 바라보니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월간중앙 1988년 3월 복간호, ‘나는 왜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나’ 중에서)
이들은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의 계엄군 만행의 책임이 단지 현 군사독재정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방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4개 대대의 병력 사용에 동의한 미국에까지도 확장된다는 인식 아래 반민주, 반민중적인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의 그릇된 정책에 대한 경종의 의미로 마침 미 국무장관 브라운의 방한 일정에 맞춰 행동을 결행했던 것이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는 5.18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거사’였고 무고한 시민학살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심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이 이 사건 관계자들의 재판과정에서의 증언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 속에 이 사건은 광주시민은 물론 국민들에게 철저히 은폐됐었다.
당국에서는 사건 당시에는 방화가 아닌 ‘전기누전’으로 처리하려는 입장을 나타냈고 관련자들이 밝혀진 뒤에는 ‘부랑아의 영웅심리의 발로’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관련자의 한사람인 임종수씨는 “5.18민중항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은 나를 안일한 소시민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미문화원 방화라는 역사적인 봉화를 올리도록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오랜 기간 동안의 도피생활 끝에 체포된 정순철(작고)씨는 “대등하고 올바른 한미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충정에서 반미가 아닌 친미로써 그리고 방화가 아닌 봉화로써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다”고 회고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대외정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이들이 ‘광주항쟁과 미국의 관계’를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알릴 가장 상징적인 곳으로 미문화원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정권은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지만 광주 미문화원의 불은 꺼진 것이 아니었다. ‘왜, 미문화원인가’란 물음 속에 5월 광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불길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급기야 대미관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광주항쟁의 경험 속에 피어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등 본격적인 반미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5.18민주화운동과 반미항쟁
1982년에는 이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 훨씬 충격적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 두 개의 미국에 대한 ‘사건’에서 보듯 광주민중항쟁은 이제까지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누구도 문제로 제기하지 못했던 미국과 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대하여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광주민중항쟁이 내포한 주요한 의미 중의 하나로, 광주민중항쟁을 하나의 지역적,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민족운동의 폭발적인 출발점으로 끌어올리는 ‘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이 체제를 달리한 분단상황에 6.25를 거친 한국에 있어 ‘반미구호’는 금기였고, 이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내몰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의 교훈은 광주를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군부독재 타도’와 ‘반미’를 동반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이는 역대 정권과 미국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검토하고, 한국의 민주화에서 있어 미국의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80년대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논문들과 사회과학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이 같은 논의는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중 속으로 더욱 확산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80년대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학생운동 세력들에겐 민족문제인 ‘반미 자주화’가 반독재 민주화와 함께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외과)는 ‘광주민주항쟁과 2단계 민주화’란 논문에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무드는 광주를 훗날 민족문제해결을 민주화와 동일시하거나 오히려 전자를 우선시하는 이른바 NL(민족해방:80~90년대 학생운동의 한 계열)의 온상이 되도록 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광주항쟁의 경험은 곧바로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이어졌고 5.18당시 미국의 애매한 친 신군부 지향은 그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서울 미문화원 점거에 이어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2명의 여중생 추모를 위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미촛불시위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이는 결국 80년 당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한국사회 전반에 미국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미국의 존재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간파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동시에 한미간의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자양분이 됐다.
5.18과 미국의 책임성
80년 5월 22일 광주의 모든 도로가 피비린내로 진동할 무렵, 미 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로스는 “미국 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고 한데 이어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광주사람들은 신군부의 잔인한 학살을 막아줄 유일한 구세주로 미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처럼 세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 한미연합사는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20사단(당시 사단장 박준병 소장)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동의하고 광주의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북한의 무력도발을 야기할 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리고 동해안에 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까지 급파했다.
공수특전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부대다. 하지만 철책선을 지키는 20사단은 미국의 동의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부대였다. 따라서 미국의 작전통제권에 놓여있던 20사단이 왜 광주에 오게 됐는가는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핵심열쇠인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다. 80년 육군본부 ‘육군 참고자료지’에 따르면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5.18학살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인 셈이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 의문점과 아쉬운 점
당사자들의 증언에 이어 광주 미문화원 방화의거에서의 의문점과 아쉬운 점도 이야기됐다.
박시영씨는 의문점으로 “방화사건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학생들이 시위예비음모죄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 정순철이 시위가 무산되자 불이라도 지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한 것이 단서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임종수씨는 아쉬운 점으로 “당시는 미문화원을 방화하면 죽는 줄 알았다. 한 번 죽으나 열 번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으로 광주 미문화원 방화를 계획할 때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있는 미문화원을 전부 방화한 후 성명서를 내기로 한 것이었는데 첫 거사에서 붙잡히면서 계획이 틀어졌다”면서 “결과론적이지만 우리의 입장을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경찰에 검거된 후 법정에서 방화 동기를 알리기로 입장을 변경하면서 5.18 당시 학살을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데 주력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