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
▲ 오방로가 시작되는 무등1차 앞 교차로 |
오방로는 2008년에 독립운동과 사회운동, 나환자 치료에 일생을 바친 최흥종(1880~1966년) 목사가 생전 활동했던 봉선동, 방림동 인근 도로에 그의 호인 오방(五放)을 따서 지은 길이다.
이 도로는 남구 봉선동 8-1 온누리교회를 시작으로 남구 방림동 351-3까지 1185m에 달하는 길이며, 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왼편에는 많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즐비해 있고, 오른편에는 동아여중, 동아여고, 숭의중, 숭의고 등 4개의 학교가 연이어 있다.
언덕에 위치한 학교들을 지나면 무등산 증심사로 가는 방림터널 입구가 나오고, 더 올라가면 방림사거리가 나온다. 더 쭉 올라가면 대남대로가 나오는데 여기를 종점으로 오방로는 끝이 난다.
오방(五放) 최흥종목사는
그는 빈민운동과 농촌계몽운동, 독립운동 등에 힘쓴 목사이며, 1880년에 전라남도 광주읍 불로동에서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 생모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맞이한 계모 밑에서 자랐다. 12년 후에 부친인 최학신도 사망하면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최흥종은 이십대 초반까지도 ‘망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장터에서 잘 알려진 싸움꾼이었고, 건달패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친구 최재익과 건들거리면서 장날에 장에 온 사람들에게 돈을 뜯는 깡패짓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04년 김윤수의 소개로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년) 한국명 배유진을 만나고, 유진 벨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고있던 기독교 신자의 조력자인 김총순 부부에게 인도를 받았다.
이어 그는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Clement Owen, 오원) 선교사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에서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교한 후 술과 담배를 끊고 건달패 생활도 완전히 청산했다. 드디어 철이 든 그의 나이는 당시 24세였다.
나병(한센병)환자와의 만남
그는 영광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다 1909년에 다시 광주로 올라와 양림동에 위치한 제중병원(기독병원)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해 추운 겨울날, 오웬 선교사가 위급하다는 소리를 목포에서 들은 미국선교사 포사이트는 광주로 돌아오는 도중 길가에 죽어가던 한센병 환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격한 냄새와 피고름이 흐르는 나병환자를 자신이 타고 왔던 나귀에 태우고, 자신의 털 외투를 벗어 환자에게 입혔다.
유진 벨 선교사의 부탁으로 포사이트를 배웅하러 갔던 최흥종은 나병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고삐를 이끌고 오던 포사이트 선교사의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포사이트가 나병환자를 부축하며 옮기던 중 나병환자의 지팡이가 떨어졌고, 포사이트는 그에게 지팡이를 집어달라 하였지만, 피고름이 잔뜩 묻은 지팡이를 선뜻 줍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포사이트 선교사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에 ‘같은 민족도 아닌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돌볼 수 있는가’하며 가슴 깊이 감화받았고, 이것이 그의 일생 신앙생활의 뿌리가 되었다.
유진 벨 선교사와 윌슨 선교사의 동의 아래 광주읍 양림리에 선교사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은 집 옆에 이 나병환자를 위한 처소가 마련되었고, 매일 포사이트 선교사가 환자에게 음식을 전달했다.
이후 나환자들이 제중병원에 몰리면서 일반환자보다 나환자 수가 더 많아졌고, 시민들은 나환자를 몰아내려했다. 이로 인해 제중병원은 인근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를 계기로 최흥종은 1911년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하여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다.
그 후 최흥종 목사의 활동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자격을 얻었고, 북문밖교회 목사로 취임했다. 그리고 1920년 7월 29일 광주YMCA를 창설했다.
1932년에는 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고, 나환자촌에 숫자가 늘면서 유지하기 어려워진 그는 1933년에 수백여 명의 나병 환자들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조선총독부까지 '구라(救癩) 행진'을 강행했다.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약속을 일본총독으로부터 받아냈다. 또한 일제에게 농토를 빼앗겨 유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시베리아로 1922년과 1927년 두 차례에 걸쳐 선교활동을 나가기도 했다.
1930년 광주 기독교계는 어지러워지고, 일본의 통치로 각 단체의 분열이 심각해졌다. 그는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세상을 등진 뒤 무등산에서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며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해방 후 활동
해방이 되자 그는 다시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우선 해방직후 45년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장과 재건된 광주YMCA회장, 조선나병환자 근절위원회회장, 여수 호예원 임시원장을 맡았으며, 소록도 갱생원과 여수 요양원에 물자 및 경비 주선을 했다.
이어 48년에 호남신문사 회장, 49년에는 의재 허백련과 삼애학원(농민지도자 양성)을 설립 했고, 51년에 사회사업협회 위원장, 55년에는 나주군 산포리에 음성나환자 정착촌인 호혜원을 설립하여 함께 기거했다. 58년엔 송등원(폐결핵 환자요양소)를 창설했다.
62년에는 원효사 입구에 음성결핵환자를 수용하는 ‘무등원’을 세웠다. 최초의 목회자요 민족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은 66년 5월 14일 별세하기 전까지 평생을 소외계층과 난민, 한센병환자와 결핵환자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는 수 백명이 넘는 나환자들과 걸인들이 몰려들어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기고 가십니까?"라고 통곡하며 장례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1962년 정부는 그런 그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 무등산 입구의 묘소에서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됐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광주사회장(66년 5월 18일)으로 장례를 치뤘다. 현재 광주YMCA에서는 오방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의 호가 오방(五放)이라 지어진 이유는
그의 호인 오방(五放)은 '정치에 방기, 경제에 방종, 가사에 방만, 사회에 방일, 종교에 방랑' 등 5가지 해방을 뜻하는데,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경제적으로 속박받지 않으며, 가족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는,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 없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다.
고로 ‘오방’은 식욕, 성욕, 물질욕, 명예욕, 생명욕을 버린다는 뜻으로 . 최 목사의 생활신조다.
지금의 오방로가 지정된 계기
광주YMCA와 사단법인 오방기념사업회는 오방 최흥종 목사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과 평화와 생명사상이 광주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라며 최 목사가 당시 토지 1000평을 기증해 윌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나병원 자리와 나병원 여자진료소(현 무등아파트 위치) 자리 주변 도로인 현 제1순환도로-동아여고간 도로를 '오방로'라고 지정해 주기를 건의했다. 그리고 2008년 12월 10일에 '오방로'로 지정됐다.
하지만 현재 오방로에는 오방 최흥종 목사에 대한 기념비, 흉상, 등 그와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에 대해 남구 관계자는 "양림미술관으로 확정이 됐고, 올해 말부터 공사를 시작한다"고 전했다. 그가 활동했던 양림동에 지어진다고는 하지만 오방이란 이름이 붙여진 오방로에는 그에 대한 것이 없어 조금 떨떠름할 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