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5)-정율성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5)-정율성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6.16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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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정율성 기리는 거리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광주광역시 동구 남광주에서 시작하는 대남대로를 따라 남구 양림2단지 휴먼시아에 이르면 정율성로가 눈에 들어온다. 정율성로는 이곳 대남대로 58~62 사이에서 시작해 기독간호대학교 앞 양림로까지 237m의 아주 짧은 거리다. 2009년 1월 29일 고시하고, 개통식을 가졌다.

폐선부지에 꾸며진 푸른길공원을 따라 정율성로 이르렀다. 입구에 서니 갖가지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정율성 생가, 기독간호대학,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양림길 등 안내판들이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게 없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율성로 초입 각종 안내판, 제대로 된 게 없어

정율성 생가와 기독간호대학의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판은 정반대쪽인 방림동을 향하고 있는데다가 떨어지기까지 했다.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양림길 안내판의 경우는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코스 안내와 안내도 속의 번호가 하얗다. 알림번호를 스티커로 붙여놓았는데, 이 스티커가 빛에 바래서 못쓰게 됐다. 해당 지자체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대목이다.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양림길 안내판 옆을 보니 모니터가 하나 보인다. 정율성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모니터는 히딩크호텔 앞 정율성 생가터에도 설치되어 있다. 지난해 8월 법원이 정율성 선생 출생지 확인 소송을 ‘각하’하면서 광주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두 곳에 모두 설치한 것이다.

히딩크호텔에서 만난 한 직원은 “법원에서 '출생지 논란은 무의미하다'며 불로동과 양림동 모두 생가로 인정해줬다”면서 “이 때문에 광주시에서 홍보영상도 틀어주고, 우물터도 조성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곳이 출생지고, 양림동은 성장한 곳이다”고 덧붙였다.

정율성로 초입 왼편,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는 곳에 대나무에 둘러싸인 흉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바로 광주 남구 양림동이 고향인 정율성의 흉상이다. 펜을 든 오른손과 허공을 움켜쥘 듯한 왼손, 뭔가를 부르짖는 입모양이 국내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조각품과는 다르게 힘차고 역동적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제작해 광주 남구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 흉상에 이어 정율성거리전시관이 길 왼쪽 양림2단지 휴먼시아 벽면에 꾸며져 있다. 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작곡한 ‘옌안송’(延安頌)의 악보 동판이 있고 관련 기록물, 사진, 이력 등이 벽면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옌안송’과 더불어 ‘연수요’, ‘평화의 비둘기’, ‘3.1행진곡’, ‘우리는 행복해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등 6곡의 음악을 버튼을 눌러 들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조금 더 옆으로 정율성거리 키오스크(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은행, 백화점, 전시장 등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단말기)도 설치되어 있어 독립운동가이자 현대 중국음악의 대부로 추앙받는 정율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검색해 볼 수 있다. 이 키오스크에서는 정율성 일가의 항일정신, 음악과의 만남, 동아시아의 예술혼 등 정율성에 대해 알 수 있다.

정율성,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중국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

▲ 정율성 부부사진

정율성(鄭律成),1914~1976)은 이곳 광주에서 태어나 주로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중국의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중국사회과학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3억명 이상이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며, 10억명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알고 있다. 1992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의 첫머리에 그의 노래가 불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율성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정율성의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부은(富恩)이다. 아버지는 정해업(鄭海業)이고 어머니는 최영온(崔英溫)이며, 부인은 딩쉐송(丁雪松), 외동딸은 정샤오티(鄭小提)이다.

정율성은 부친을 따라 1917년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능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다시 광주로 이주하면서 숭일소학교에 다녔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외삼촌 최흥종 목사의 양림동 집에서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양림교회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한국 YWCA운동의 선구자인 외숙모 김필례(최영욱 초대 전라남도지사의 아내)도 광주 최초의 음악회를 연 인물로, 정율성은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1929년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33년 의열단 호남지역 모집책인 셋째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南京)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정율성은 1933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난징과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에서 레닌그라드 음악대학 출신의 소련 작곡가 크리노와(Krenowa) 교수를 만나 성악·작곡·피아노·바이올린 등을 배우고 ‘율성(律成)’으로 개명하였다.

1937년 정율성은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였고, 1938년 루쉰(魯迅)예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9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하였다. 이 무렵 그는 루쉰예술학원 성악학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딩쉐송(丁雪松)을 만나 결혼하였다.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 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처녀 적녀성’, ‘조선 의용군 행진곡’, ‘연안송’, ‘팔로군 행진곡’ 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북한으로 건너가 1947년 조선인민군 구락부장 겸 조선인민군 협주단장, 1949년 조선 음악대학 작곡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 인민군 행진곡’도 작곡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중국으로 소환되어 중국 국적을 얻고 베이징의 인민 예술 극원·중앙 가무단·중앙 악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연 및 창작 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근교에서 고혈압으로 숨지고 말았다. 이후 1988년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 해방군가’로 지정되면서 복권되었으며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으로 꼽힌다.

지자체 노력에 비해 인지도 낮아

이처럼 광주가 낳은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또 광주시와 남구청이 공들여 홍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율성로’에 대한 시민들과 학생들의 인지도가 생각보다 낮아 안타까웠다.

‘정율성로’에서 만난 시민과 학생 10여명에게 '이 도로의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한 결과 정확히 답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특히 가까운 학강초등학교 학생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지역의 문화자산에 대한 특별수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가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로의 이름과 명명된 이유를 대체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길 중간쯤에 이르러 오른쪽 골목길로 20여m들어가니 정율성 생가가 있다. 정율성 생가는 ‘정율성로 16-7’이다. 생가 대문 앞에는 음악가 정율성을 설명하는 입간판이 한글과 중국어로 적혀 있다. 광주에 오는 중국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지금은 다른 이가 살고 있어 담장너머로 잠깐 내다볼 수 있을 뿐이다.

정율성 생가와 관련한 지리한 논란은 지난해 10월27일 관련 자치단체들이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초진키로 합의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과 노희용 동구청장, 최영호 남구청장, 구충곤 화순군수는 공동합의문을 통해 소모적인 생가 논란을 넘어서 정율성 선생을 소중한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하고 정신계승 및 선양사업을 공동 협력해 추진키로 했다.

정율성 생가에 대한 길안내표지판은 대체로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정율성로뿐만 아니라 천변우로, 양림로에도 설치되어 있다. 다만 양림로에 설치된 정율성생가 안내판은 한쪽의 화살표가 잘못되어 있어 교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 정율성로가 위치한 옛 양림동은 대한민국 최고의 근현대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촌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인 정율성(1914~1976)의 음악적 원천이 된 것은 양림동에서 보낸 소년기와 청년기였다. 어린시절 양림동 외삼촌 집에서 피아노를 치던 정추(1923~2013)도 양림동이 배출한 천재 작곡가다. 김현승 시인(1913~1975)은 평양태생이지만 양림교회에 부임한 아버지 김창국 목사를 따라 7세에 양림동에 이사를 와, 교회를 다니고 골목에서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노닐던 양림 언덕과 아픈 몸을 휴양하며 고독과 함께 거닐던 골목길은 김현승의 시가 되었고, 그런 만큼 시인의 양림동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김현승 시인뿐 아니라 양림동은 많은 문학인들의 고향이자 거처였다. 한국현대문학사에 의미있는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작가 문순태는 현재 양림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선 곳에 있었던 거처에서 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의 아픔과 한을 담은 ‘징소리’(1978년 발표)를 집필했다. 한국대하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 황석영의 ‘장길산’(1984년 발표)도 그가 양림동에서 살 때 쓴 작품이다. 역대 한국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65.8%)한 ‘첫사랑’(1997)과 뜨거운 화제를 낳았던 ‘젊은이들의 양지’를 쓴 드라마 작가인 조소혜 역시 양림동에서 40여 년을 살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개발에 의해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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