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24) 미용명장 정찬이 원장
남도의 멋을 찾아서(24) 미용명장 정찬이 원장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12.14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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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격식에 맞게 잘 어울리는 멋
고전머리에서 현대 미용까지 이어지는 가교 역할
쪽머리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 미용명장 정찬이 원장

근대 문화와 함께 한 미용역사의 산 증인인 정찬이 명장을 찾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머리카락도 소중히 간직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대신 두세가닥으로 묶어 땋은 머리를 했다. 정찬이 명장은 57년간 미용 관련 일에 종사해 왔다. 세월이 말해 주듯이 정찬이 명장의 경력은 화려하다. 또한 각종 상장과 상패만 해도 50여점이 넘는다.

특히 고전머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후학들에게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알리고, 이를 토대로 현대인들의 머리 스타일을 창조하는데에도 이바지했다. 이러한 정찬이 명장의 노고에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2016년도 대한민국 산업명장 미용분야에서 명장으로 선정했다.

▲ 가체머리(조선시대)

57년전

정찬이 명장은 57년전 6·25전쟁도 끝나고 복구사업이 한창이던 때, 여성들도 직장을 갖고 산업전선에 한참 뛰어 들던 시절 미용을 배우게 됐다. “처음에는 양장 기술을 배울까 하다 사촌언니의 ‘미용을 배워 놓은 것이 더 전망이 있다’는 말에 미용 기술을 배우게 됐다”면서 “그때 운암동에 있는 미용기술학교에 입학하게 됐다”고 옛날을 회상했다.

1960년대만 해도 6·25전쟁의 아픔을 딛고 경제를 일으키는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특히 양장이나 미용 분야에 붐이 일고 있을 때였다. “입학했을 당시 기술학교의 규율도 엄격했는데 정원이 120명 다 찼고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부터 대학교수 부인까지 다양하게 배우러 왔었다”면서 “미용 기술을 배우는데 어렵고 힘들었지만 즐겁게 배웠다”고 회고했다.

▲ 노국공주머리(고려시대)

미용기술학교를 졸업 후 정찬이 명장은 서울로 올라가 종로에 있는 미용실에서 학교에서 배운 기술과 새로운 유행을 접목한 미용 기술을 맘껏 펼치면서 미용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미용 기술을 배워 종로에 있는 미용실에서 영화 배우들의 머리를 손질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5년여의 서울 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모교에서 미용기술을 전수하며 본인만의 미용실도 차리게 됐다.

▲ 미실머리(신라시대)

정찬이 명장의 제자들은 기능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기도 했다. “미용협회에서 활동하다 보니 각종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기도 해 사설기관에서 개최하는 대회에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무기징역 제소자를 설득해 미용기술을 가르쳐 지방기능대회에서 동상, 전국기능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던 일이다. 기능대회를 얼마 남겨 놓지 않고서는 교도소로 출근해 가르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 미인도머리(조선시대)

고전머리를 알아야

사람들은 머리에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을까? 처음에는 흐틀어진 머리 상태(피발)로 다녔다고 한다. 머리가 길면 긴 상태로 다니다가 머리카락을 묶으기(속발) 시작하면서 머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빗을 만들면서 가지런하고 윤기있게 머리카락을 손질(수발)했다. 그런 후 머리카락 두세 가닥을 땋아(편발) 다니기 시작했다.

▲ 선덕여왕머리(신라시대)

정찬이 명장은 머리카락을 손질하다 보니 옛 선인들의 미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사극을 보다보면 그 당시 나오는 인물들의 머리 스타일이 맞는지, 또는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머리카락을 관리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기 시작했다”면서 “옛것을 제대로 알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특히 그는 미용 스타일은 한때 유행했던 것이 다시 돌아 유행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고전머리를 연구해 배울 점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2006년부터 고전머리에 대한 연구를 관심 있는 사람들과 진행하고 있다. 옛 선인들의 미용에 대한 기록은 벽화나 그림, 문헌 등을 통해서 연구한다. 그리고 그 머리 스타일을 재현해 본다.

▲ 조천계(고려시대)

우리가 지금도 예를 갖출 때 하는 쪽머리(쪽진머리)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1669년 조선왕조 헌종 때 경주 부사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경주의 산천, 풍속을 기록해 놓았는데 쪽머리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제1권 풍속편에 羅時 以國都北方虛缺 女子結髻於腦後 因名北髻至今猶然,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신라 때 수도의 북쪽이 비어 있는 것 같고,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 여자의 머리카락을 묶어서 뒷머리에 두게 하고 그 이름을 북계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백제나 고구려의 여인들도 쪽머리를 했는데 여성의 머리 모양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쪽머리는 크기와 위치, 그리고 장식품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기도 했다.

▲ 트레머리(조선시대)

한국 미용이 가야할 길

미용실은 근대문물이 유입된 시기에 다른 점포들과 함께 생겼다. 아낙네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했고, 멋쟁이들의 최신 패션에 대한 중요한 정보센터 역할도 했다.

정찬이 명장은 한때는 명동에서 일류 미용사가 되고자 했다. 기술을 배우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일류 미용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 황진이(조선시대)

올해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미용명장이 되면서 어깨가 무겁다. “국가에서 명장으로 뽑을 때 그냥 뽑아 준 것은 아닐테고 미용분야의 발전을 위해 밑거름이 되길 바라면서 명장의 지위를 준 것이다”면서 “기술을 후학들에게 전수하여 미용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감이 앞선다”고 말했다.

작년 예술의 거리에서 고전머리 체험활동을 했을 때 외국인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가채로 만든 고전머리들은 그 화려함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한복과 함께 체험을 하는 것은 외국인뿐만아니라 모두에게 독특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정찬이 명장은 우선적으로 미용 전수관이 있었으면 했다. “전수관에서 새로운 기술을 알려 주기도 하고 미용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박물관 기능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면서 “전통의상과 고전머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행사들도 자주 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 힐자계머리(삼국시대)

남도의 멋은

정찬이 원장은 “우리 조상들은 머리 모양도 화려하게 치장해 위엄을 보이려 했지만 평상시에는 생활 속에 녹아든 편리하면서 실용적으로 머리를 해왔다”면서 “남도의 멋은 특출나거나 톡 튀어나지 않게 장소와 격식에 맞게 잘 어울리는 멋이다”라고 했다.

고전머리를 통해 옛 것을 재현하고 그것을 현대의 머리 스타일과 접목 시키는 명장의 손 끝에서 오늘도 머리카락이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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