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17일, 8차 촛불집회 날에 명동성당 입구에 있는 ‘이재명(1890~1910) 의사 의거터’ 표석을 보았다. “그는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2. 1909년 12월22일 오전 11시 반 경 이완용(1858~1926)을 태운 인력거가 명동성당 앞을 지나자,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이 인력거를 덮쳤다. 이완용은 10시에 개최된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성당을 나와 저동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앞을 가로막자 그는 단칼에 박원문을 베어 죽이고, 곧바로 인력거에 올라 타 이완용의 왼쪽 어깨와 허파 부분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이 피하면서 인력거 밑으로 굴러 떨어지자 그는 이완용을 올라타 허리부분을 두 번이나 찔렀다. 세 곳에 상처를 입은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급히 저동 집으로 옮겨졌다가 응급 치료를 받았고, 다음 날 대한의원 (지금의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서 50분간 수술을 받았다.
상처는 대단히 깊었다. 왼쪽 어깨로 들어간 칼은 왼쪽 폐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혔다. 허리 부분을 찔린 두 번째와 세 번째 칼의 상처도 신장 가까이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이완용은 1910년 경술년 새해를 대한의원에서 맞았다. 회복은 빨라 입원한지 33일 만에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입원 53일 만인 1910년 2월 14일에 퇴원했다.
#3. 현장에서 체포된 이재명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1904년에 미국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노동 일을 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 매국노들을 처단하겠다는 생각으로 1907년 10월에 귀국했다.
20세의 청년 이재명은 서울에서 평안도 출신 오복원 · 김용문 등을 동지로 끌어들였고, 11월 하순에 평양으로 가서 김정익· 이동수 · 이응삼 등을 규합했다. 모두 13명이었다. 그런데 김정익은 일진회장 이용구를 먼저 죽이고 나서 이완용을 죽이자고 했고, 이재명은 이완용부터 척살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안재명 · 이동수 ·김병록 3인은 이완용 척살키로 하고 김정익 · 조창호 2인은 이용구를 살해키로 조를 짰다.
#4. 한편 10월26일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친일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이토를 스승으로 모셨던 이완용에게는 충격을 넘어 공포였다.
경악스럽게도 12월4일에 일진회장 이용구는 100만 명 회원의 연명이라면서 한일병합성명서를 선포했다. 그리고 한일병합 상주문과 청원서를 순종과 소네 통감, 이완용 총리에게 보냈다. 주1)
12월7일 이완용 내각은 일진회의 합병 청원을 각하시켰다. 다음날 일진회는 다시 청원서를 이완용에게 보냈고, 이완용은 다시 각하시켰다. 그리고 이완용은 측근인 이인직 주2)을 급히 불러 대한협회 등을 동원하여 일진회의 청원에 반대하는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토록 지시했다. 이에 척족 대신인 민영규와 민영소등이 국민대회를 발기시키고 일진회 공격에 나섰다. 이는 이완용이 한일합병의 공을 일진회에 빼앗길까 보아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12월22일에 피습 당하자, 한일 병합 논란도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주1) 일본 각의는 1909년 7월6일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강제병합하기로 하고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다.
사실상 호남의병 토벌 작전인 이 작전은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이루어졌는데, 일본은 2개 연대 2,300명과 군함 10척을 동원하여 호남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호남의병은 500여명이 전사했고, 약 2천명이 체포되었다.
주2) 이인직(1862∽1916)은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완용에 의해 대한신문 사장이 되었고, 이완용의 비서로서 한일합병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