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행 출간 '상사화 지기 전에' 시집=바로 ‘영화’같네
이건행 출간 '상사화 지기 전에' 시집=바로 ‘영화’같네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4.10.08 2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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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시집이 출간됐다.
시인지, 영화인지 모를 정도여서 그렇다. 읽으면 금새 어떤 사건이 머리에 그려지고, 그러기에 시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상사화 지기 전에’시집을 출간한 이건행 시인

다시 말해 아주 쉽게 읽혀지는 특장이 있어서다.
시집 전문 출판사 '북인'에서 나왔다.

이건행 시인의 ‘상사화 지기 전에’에 실린 시들을 촘촘이 들여다 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이 시는 “삶에 대한 연민과 뭉근한 슬픔”이 관통하고 있다.
사건의 연속인 우리의 일상에 두레박을 깊이 내려 시를 길어 올리는 것 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시집에 실린 ‘사랑의 무게’를 들여다 보노라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착각에 빠져든다.

시인은 대학생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면서 첫사랑의 얼굴을 멀리에서라도 보기 위해 충남 공주로 향한다.

하지만 공주 사대 정문 한 쪽에서 첫사랑을 보지 못하고 시내 여인숙으로 간 시인은 밤새 강소주를 들이키며 교사 지망생인 그녀의 안전을 위해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이후로 그녀를 /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한다. 시리고도 웅숭깊게 노래하는 게 바로 이 시에 보석처럼 빛나는 질료임을 이내 알게된다. .

 상사화 지기 전에 시집 표지 / 도서출판 북인

건물 수위 아저씨의 사건을 다루는 ‘완패’ 또한 절로 그림을 그려지게 한다. 그는 ‘윗놈’이 부정을 통해 100만 원을 챙기면서 자신에게는 고작 10만 원만을 주자 사표를 낸다.

시인은 그를 말리면서 옥신각신한다. “나는 아저씨를 붙잡지 못했다 /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 그의 고집도 꺾지 못했다 / 2패지만 숙취처럼 가시지 않는 / 그 무언가도 있어 / 3패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고 독백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웃음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 블랙 코미디 ‘막춤’에서는 시인은 “독재자였던 동네 중학생 형”과 콩쿠르 대회에 나간다.
하지만 혼자 막춤을 추어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아 뒷전으로 밀린 ‘독재자 형’에게 무대 뒤에서 얻어맞는다.

그런데도 그는 예전처럼 “훌쩍거리거나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시인은 “나의 막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느껴 / 몸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 지난 일이 어제처럼 떠오르는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이건행 시인은 시나 소설 뿐 아니라 춤, 그림, 조각, 음악 등 모든 예술을 이야기라고 말한다.
서사이론 전문가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멀』과 그 후속편인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한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이건행 시인은 현재는 일간지에 ‘이건행 칼럼’을 연재하면서 인문학 책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97년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에 의해 ‘창’으로 영화화)를 펴낸다.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뮤지컬 ‘상대원 연가’의 모티브가 된 동명 시를 2015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해오고 있다.
2021년 시집 『호박잎쌈』(디지북스공모 선정·이북)과 인문학 소개서인 『인문독서 가이드북』(편저)을 각각 펴냈다.

◆ 그의 대표시 ‘사랑의 무게’를 읊조려 본다

사랑에도 무게가 있을까

스물한 살 초겨울

학내시위 사건으로 쫓기던 나는

무작정 서울에서 공주로 향했다

멀리서 공주사대 정문을 바라보며

온종일 누군가를 찾았다

실루엣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 졸였지만

그녀는 흔적조차 없었다

시내 여인숙에서

강소주를 마시며 밤새 흐느꼈고

그것은 작별의식이 되었다

교사 지망생인 가난한 그녀에게

나는 위험인물이어서

무조건 떠나주어야 했다

그 이후로 그녀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렇게 시시한 사랑을

저울에 달면 저울추가 움직일까

정말 사랑에 무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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