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작가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대학 졸업반일 때 작가를 불로동의 한 작업실에서 처음 만났었다. 과묵한 그는 늘 말이 없었고 어쩌다 내던진 한 마디 말은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이십 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작가를 만났다. 그는 많이 스스로에게 관대해져 있었다. 목마름과 시대의 역행에 한없이 분노하던 모습은 많이 녹아들어 편안해졌고 오히려 여전히 다혈질인 내게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지는 않나하는 농담도 건넸다.
세월은 잘 간다. 다시 손 대주기를 기다리는 시간. 잘 간다. 덮어도 덮어도 다 덮어지지 않은 시간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 절망의 깊이만큼 희망을 가지고 잘 간다.
너무 편안해하는 마음을 가꾸고 있는 작가의 지나 온 이야기를 듣다보니 꼭, 일년생 풀들의 생애 같다. 벼랑에 서서 온 몸으로 불어오는 바람 다 맞으며 사는 것이 완전한 들풀이다.
막걸리 속에서 세상 이치를 터득하고 혜안(慧眼)을 갖게 해
많이, 부단히 막걸리를 마셨다. 80년대 세월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하기도 했지만 절망의 깊이에 떨어트리게도 했다.
불로동 작업실에서 오가는 소설가, 시인, 연극인, 노래패 등의 이 지역 문화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걸개그림을 그려내는 일과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혁하고자 하는 변혁이 중심이었다.
“어려웠지만 그 시절이 좋았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항상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져 있는 느낌이었다”고 아스라한 기억을 떠올리며 회환에 젖는다.
그곳에서 목판화도 처음 만났고 본격적인 작업도 행했다. 불로동 작업실에서의 시간을 “내 인생을 일으키고 정립하는 뼈대를 갖추게 한 정점”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대학의 자퇴와 복적을 거듭하며 작가의 삶은 온전하게 민중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 후 만나는 세상을 그는 이미 받아들이고 현장에서 이미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민중문화연구회에서 공동으로 작업했던 온갖 종류의 걸개그림은 80년대 민중미술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작업에 참여했으며 작가를 빼고는 민중미술사와 공동 작업을 언급하지 못할 정도다.
1989년의 첫 오월전에서 ‘18일 공수부대 투입’, 해마다 열리는 ‘거리의 오월전’ 등 공동 작업이 있는 현장, 그 자리에 그는 항상 있었다.
천천히, 느리게 살아가는 법
“나는 작가도 아니다”고 버릇처럼 내뱉는 그는 치열한 작업의 고리를 갖고 있는 작가가 분명 맞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공동 작업이라는 이름에 묻혀 단 한 번도 개인전을 하지 않았지만 살아 온 삶 자체가 이미 온 몸으로 사람들과 혹은 사회와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말한다. “현장에서 온 몸으로 공동 작업하는데 익숙하다. 개인적인 작업은 의미가 없다. 누구라도 참여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어떤 것, 그 재료와 표현의 차이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한 몸이다. 사람들과의 소통, 자연스러움, 도구가 바로 그것이며 작가는 공동 작업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체험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그린 삶의 평면도안에는 무안함도, 어색함 도 사회적인 구조에 표현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것들이 피부처럼 늘 붙어 형상화된다. 그만큼 자연스러움에 익숙하다.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10여 년을 담양에서 살면서도 근근한 일상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처음 출발지로 돌아와 그가 다시 시작한 일은 늘 해 오던 작업처럼 다시 공동 작업의 연장선이다. 아이들에게 자신을 매개로 사회를 알아가게 하는 마음 따뜻한 일이다.
아이들, 미래의 희망을 위해
그가 요즘 하는 일은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문화를 알리는 일이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동 작업에 익숙하다.
20~30여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화를 그리거나 내 자신과 마을에 얽힌 주변의 이야기들을 풀어가다 보면 마음은 이미 천사가 되고 편집해 만들어진 영상은 아이들과 구름을 타고 다닌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미술을 선택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림 속에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도 여전히 낙서하듯, 메모하듯, 편한 작업을 하고 싶어 한다.
“다혈질인 성정을 다스리려 많은 노력을 했다. 마음과 몸이 상한 것을 경험한 후인 지금은 가능하면 무엇에든지 천천히, 느리게 사는 방법을 스스로에게 단련시킨다.”며 “보여주는 삶이나 보여 지기 위한 그림은 거부한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오늘도 꿈을 꾼다. 아이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하며 판화작업을 하고 누구나 편하게 체험할 수 있는 예술 문화공간을 꿈꾼다. 쉴 수도 있고 도시와 농촌을 이어줄 수 있는 장소가 어디든 달려가 온 몸으로 작업할 수 있는 복합공간을 꿈꾼다.
에필로그
작업실 한 쪽에 작은 침대가 있었다. 작가는 어디론가 한없이 떠내려가는 뗏목에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은 모든 시간을 길이로 나타낼 수 있는 직선이다. 그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어디로 흘러가길 원하는 것일까.
굳이 묻지 않았던 금기를 묻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꿈꾸어 오던 아름다운 세상은 무엇일까. 어떤 세상일까. 이미 다다른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여전한 여정 중에 있는 것인지.
살아오면서 날마다, 시간 시간을 애태우며 건너는 것인데도 강(江)을 건넌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인 것 같다. 그때마다 자기목숨을 한 번씩 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너무 슬퍼서 화가 난다. 돌아오는 길에 황지우님의 ‘초로(草露)와 같이’란 시(詩)가 입가를 맴돌았다.
오, 환생(幻生)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소리. 엿듣는 풀의 루선(淚腺).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의 이름을 부르며 살 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로다. 저 타오르는 불 속은 얼마나 고요할까 상(傷)한 촛불을 들고 그대 이슬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고 싶다.
문의 : 010-6642-7988
▲ 정경철 작가 |